필리핀 수도 마닐라 남부 카비테에 사는 카스피엔 그루타(12)군은 1년 넘게 주변의 놀림을 받았다. "올해도 하지 못하면 더 부끄러워질까 봐 걱정된다"고 했다. 다행히 그날이 왔다.
이날 그루타군은 임시 병원으로 바뀐 농구장에 줄을 선 가장 나이 많은 소년 중 한 명이었다. 마스크와 안면 가리개를 쓴 소년들은 빨간 천막으로 둘러싸인 나무 탁자 옆 기다란 플라스틱 의자에서 제 차례를 기다렸다. 안절부절못하는 소년, 잔뜩 긴장한 소년, 아무렇지 않은 듯 보이려고 애쓰는 소년 등 각양각색이다. 20분간의 수술이 끝난 후 그루타군이 말했다. "이 수술은 필리핀의 일부이기 때문에 이제 진정한 필리핀인이 된 것 같은 느낌입니다."
그루타군을 비롯한 소년들이 받은 수술은 포경 수술이다. 소년들은 바지를 벗은 후 수술 천으로 사타구니를 가린 채 나무 탁자에 누웠다. 국소 마취가 진행되는 동안 아이들은 물수건을 입에 악물고 두 손으로 눈을 누르며 고통을 참아냈다. 다른 야외 병원을 찾은 알메르 알카이로(12)군은 "친구들이 놀리는 데다 키가 더 커지고 운동실력도 는다고 해서 수술을 받았다"며 "너무 기쁘다"고 했다.
'툴리(tuli)'라 불리는 무료 단체 포경 수술은 수 세기나 이어진 필리핀의 오랜 전통이다. 매년 수천 명의 소년이 정부 또는 지역사회가 후원하는 병원에서 무료로 수술을 받았다. 스페인과 미국의 식민 지배, 전쟁 기간에도 끄떡없이 진행됐던 전통을 1년간 멈추게 한 건 지난해 발생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다.
그러다 올해 5월부터 일부 지역에서 재개되자 최근 AFP통신 등이 현장 분위기를 전했다. 1만2,000페소(약 28만 원)나 되는 수술비 탓에 개인 병원을 갈 수 없었던, 남성 친척들과 또래 동성 친구들에게 조롱을 당했던 아이들이 몰렸다. 그나마 코로나19 제한 조치로 이전보다 숫자는 줄었다.
필리핀은 포경 수술 비율(약 93%)이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다. 할례 의식을 하는 유대교와 거리가 멀고 무슬림 인구도 6% 정도지만 포경 수술을 남성의 필수 조건으로 여긴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필리핀 남성의 90%가량이 비종교적 이유로 포경 수술을 받는다.
"아동 학대"라는 인권단체의 낙인도 먹히지 않는다. 오히려 여덟 살도 안 된 소년조차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사회와 주변의 엄청난 압력에 시달린다. 필리핀에서 "포경 수술 받지 않은"은 겁쟁이를 뜻하는 모욕이다. 놀림은 평생 따라다닌다. 포경 수술을 받아야 진정한 성인 남자가 된다고 간주된다. 병원도 "남자답게 굴라"는 식으로 포경 수술을 조장한다. 보건 당국 역시 "포경 수술은 요로 감염, 성병의 위험을 줄인다"고 홍보할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