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과 서류를 중시하는 일본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 중 하나가 도장(圖章)문화다. 서류나 결재에 도장을 찍지 않으면 공공기관이든 기업이든 업무처리가 어려운 구조다. 도장이 필요한 행정 절차의 종류만 1만 건에 달한다고 하니 도장 찍는 시간을 줄여줄 자동 날인 로봇이 개발된 게 이상하지 않다. 날인할 때 아랫사람일수록 인사하듯 기울여 찍는 것이 겸양인 관행까지도 생겼다.
□ 아날로그 문화를 대표하던 도장은 디지털 시대엔 일본의 후진성, 비효율을 상징한다. 코로나19 사태 초기에 많은 기관이 재택근무에 어려움을 겪은 것도 출근해 도장을 찍어야 했기 때문이란 조사가 있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원격근무를 하면서 날인을 하러 사무실에 나간다고 말한 것도 그런 사례다. 물론 탈도장 움직임이 없던 건 아니지만 이를 지키려는 힘은 더 셌다. 전일본도장협회는 막강했고 의회에 구성된 ‘인장제도문화를 지키는 의원연맹’의 회장이 IT담당 장관을 맡는 일도 벌어졌다.
□ 아베 내각에 이어 스가 내각이 아날로그 도장 퇴출에 팔을 걷었다. 개혁과제로 도장 행정의 퇴출을 제시하고 이를 전담할 디지털청을 1일 출범시켰다. 코로나 사태로 극명해진 문서 만능주의가 추진력을 더한 측면이 크다. 그렇다고 코로나의 외부 충격이 개화를 이끌었던 ‘흑선(黑船)’이 될지는 알 수 없다. 후쿠시마 원전사태에서 아프가니스탄 이송작전 실패까지 매뉴얼 밖에선 허둥대는 일본의 한계는 깊지만, 위기의식은 크지 않은 탓이다. 변화에 둔감한 게 아니라면 변화 적응에 실패하는 걸 두려워하는 사회 같다.
□ 최근 ‘눈떠보니 선진국’ 책을 펴낸 박태웅 한빛미디어 이사회 의장은 이를 경로 의존성의 사례로 설명했다. 한번 일정한 제도 관습 문화에 의존하면 시대와 상황이 바뀌어 그것이 더는 적절하지 않아도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을 말한다. 경로의 저주가 남의 얘기는 아니다. 과거에 유효했지만 지금은 현실을 뒤트는 것들이 우리 사회라고 없지 않다. 일례로 새로운 택시 플랫폼으로 ‘타다’가 업계 반발에 부딪혀 실패하자 시장은 택시호출 시장을 장악한 카카오모빌리티가 사실상 요금을 결정하는 구조로 왜곡돼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