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 위한 허수아비의 몸짓

입력
2021.09.06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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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앞두고 시작된 장마가 때때로 폭우로 돌변해 전국에 큰 피해를 주고 있다. 이런 변덕스러운 날씨에도 강원 철원평야의 황금빛 들녘은 한여름 뙤약볕에서 단단히 여문 벼들이 수확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농민들은 비가 그쳐야 수확할 수 있는데 계속되는 가을장마에 애만 태우고 있다.

잔뜩 찌푸린 날씨 속에 논길을 걷다 보니 속 타는 이는 농민들만이 아니었다. 논가에 우두커니 서 있는 허수아비들도 수확을 앞둔 논에 날아드는 새들을 지켜보며 속앓이를 하고 있다. 바람의 힘에 의지해 팔에 붙은 은박지를 휘둘러 새들을 내쫓아보지만 새들은 거리낌 없이 논으로 날아들고 있다. 한때는 막대기와 짚으로만 만든 허수아비로도 새들을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젠 약아빠진 조류들이 허수아비를 무시한 지 오래되었다. 제 구실을 하지 못하니 조류 퇴치기나 매 모형의 모빌 등에 ‘자리’를 빼앗겨 곧 사라질 운명에 놓였다.

올해가 마지막일 수 있는 철원평야의 허수아비는 그래도 살아남기 위해 새들을 향해 팔을 휘두른다. 가을장마 속 황금빛 들녘과 허수아비, 그리고 참새 떼…. 그 얽히고설킨 ‘애꿎은 운명’ 속에 풍년이 익어간다.



왕태석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