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폭력과 코로나 시대의 역설

입력
2021.09.02 18:00
26면

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코로나 유입으로 영국에 이동제한령이 내려졌던 지난해 4월 BBC의 여성 앵커 빅토리아 더비셔는 뉴스 도중 ‘0808’로 시작되는 전화번호가 적힌 손등을 시청자에게 내밀었다. 영국 가정폭력 상담기관의 전화번호였다. 이동제한령 발령 이후 신고전화가 25% 증가한 사실을 들어 가정폭력에 대한 경각심을 주려는 의도였다.

□ 코로나 사태로 이동제한, 재택근무 등이 장기화되면서 세계 각국에서 가정폭력이 크게 늘었다. 지난해 6월 유엔여성기구에서 발간한 보고서는 이동제한령을 시행한 대부분 국가에서 재정상황 악화 및 불안으로 갈등이 야기돼 가정폭력이 증가했다고 밝혔다. 지난해 인도, 브라질 등 37개국 아동과 여성을 조사한 ‘세이브더칠드런’의 보고서에서도 아동이 있는 가정의 약 32%가 가정폭력을 경험한 것으로 집계됐다.

□ 우리나라에서도 코로나 사태로 가정폭력이 늘었음을 방증하는 정부의 공식 통계가 최근 나왔다. 보건복지부의 2020년 아동학대 통계에 따르면 아동학대 신고 접수는 2.1% 증가해 예년보다 증가폭은 낮았다. 그러나 가해자가 부모인 경우(82.1%)는 2012년 이후 가장 컸다. 학대로 사망한 아동은 43명으로 아동학대를 공식 집계한 2001년 이래 가장 많았다. 가해자가 가족인 잔혹한 학대가 많이 벌어졌다는 얘기다. ‘2020년 장애인 학대현황 보고서’도 비슷하다. 학대 신고 건수는 전년보다 줄었으나 부모ㆍ배우자ㆍ친인척에 의한 학대(32.8%) 건수는 6.0%포인트 증가했다. 복지기관, 학교 등이 코로나로 휴관하면서 장애인들이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져서다.

□ 시인 진은영은 가족에 대해 “밖에선/ 그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 집에만 가져가면/ 꽃들이/ 화분이/ 다 죽었다”고 비유했다. 가족은 서로가 버팀목이 되기도 하지만 관계가 틀어지면 누구보다 낯선 타자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타자의 폭력에 따른 희생자는 아동, 노인, 여성, 장애인 같은 가족 내 약자다.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없는 셈 칠 수는 없다. 가족끼리도 서로가 거리를 두고 스스로를 돌볼 시간이 꼭 필요하다는 코로나 시대의 역설을 생각해 본다.

이왕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