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58)씨는 지난해 2월 친언니에게 소송을 당했다. 6년 전 빌려간 2,500만 원을 갚으라는 취지였다. A씨는 자신이 빌려갔다는 1,500만 원은 '모르는 돈'이고, 1,000만 원은 자매가 함께 쓰던 계좌에서 '자기 돈'을 인출한 것뿐이라고 반박했다.
격렬한 법정 다툼 끝에 패소한 A씨는 그해 10월 1심 판결문을 받고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2,500만 원을 갚으라”는 결론 외엔 법원의 판단 사유가 단 한 글자도 적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A씨는 “판결문에 왜 판결 이유가 없나.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며 항소했다.
A씨 사례 같은 ‘깜깜이 판결문’은 주변에서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소송가액이 3,000만 원 이하인 민사사건은 ‘소액사건’으로 분류돼, 판사가 판결 이유를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당초 신속한 권리 구제를 위해 도입된 제도였지만, 효율성만 앞세운 재판이 늘어나면서 당사자의 알 권리를 침해하고 사법 불신을 초래한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2일 대법원 사법연감에 따르면 최근 5년간(2015~2019년) 전국 법원에 접수된 민사사건 1심 가운데 소액사건은 72.4%(연 71만 건)에 달한다. 소액사건 제도는 ‘간소화 절차’가 핵심이다 보니, 판결 이유를 생략할 수 있는 특례 조항이 있다. 변론 없이 피고에게 원고 요구를 전달해 이의가 없으면 확정하는 이행권고 제도도 소액사건 심판법에 포함돼 있다.
문제는 신속한 재판에 몰두할수록, 충실한 판결은 뒷전으로 밀려난다는 점이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시민권익센터 운영위원장인 김숙희 변호사는 지난달 31일 판사 출신 최기상 의원이 주최한 토론회에서 소액사건 재판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는 “소액사건 1심은 판결 이유를 안 쓰기 때문에 당사자는 항소심 결과를 받고서야 판단 사유를 알게 된다”면서 “상고 가능 사유도 헌법 위반 등으로 극히 제한돼 있어 사실상 1심제나 마찬가지”라고 꼬집었다.
패소한 당사자 입장에선 판결 이유를 모르니 결과를 받아들이기 어려울 뿐 아니라, 항소를 통해 다퉈 보기도 쉽지 않다. 판결에 불복했을 때 승산을 가늠할 근거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최정규 변호사는 "법에 명시된 구술에 의한 소 제기와 공휴일·야간 재판 등 시민들이 기대하는 내용은 사문화된 반면, 판결 이유 생략 제도는 소송을 통해 구제받으려는 시민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지적했다.
법조계에선 소액사건 항소율(최근 5년간 3.7%)이 민사합의(47.4%)나 민사단독(19.1%) 사건에 비해 현저히 낮은 것도 '무성의한 판결문'의 영향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더구나 소액사건의 경우 변호사 비용 부담 탓에 대부분 '나홀로 소송'에 나서기 때문에, 판결 이유를 파악하는 게 당사자에겐 더욱 중요하다. 최기상 의원은 7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소액사건에서도 판결 이유를 적도록 하는 개정안을 발의했다.
소액사건 재판을 내실화하려면, 법관 증원 등 구조적 개혁이 병행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소액사건 재판부의 업무 부담이 과중한 상황에서 판결문 작성까지 하게 되면, '재판 지연'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서울중앙지법 기준 소액사건 재판부 판사는 25명에 불과한데, 연간 21만6,200여 건(2019년 기준)의 소액사건이 접수되고 있다. 1인당 8,600여 건의 사건을 맡아야 하는 셈이다.
소액사건 경험이 많은 법률구조공단의 한 변호사는 “판결문을 안 쓰게 되면 사건 처리는 빠르고 쉽겠지만, 판결 논리를 정교하게 다듬는 '판결문 작성' 과정이 빠지다 보니 잘못된 판결이 나올 가능성도 커지고 사법 불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서 “근본적으로 법관 인력을 늘려야 해결될 문제”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