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석의 원석을 찾아내는 일은 감동을 준다. 영국 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노동자 아버지와 발레에 천재적 재능을 가진 아들에 관한 이야기다. 아버지의 헌신으로 아들의 숨겨진 재능이 보석처럼 빛났다. 국외 한국문화재에서도 보석의 원석을 찾아내는 일이 있다. 바로 ‘실태조사’다. 실태조사는 외국에서 한국문화재를 발견하고 분석하여 그 가치를 올곧게 평가하는 일이다.
국외한국문화재에 대한 실태조사가 도입된 것은 1992년의 일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일본 교토국립박물관을 조사한 것이 처음이었다. 2012년에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설립되면서 그 중요성은 더 부각됐다. 하지만 국외한국문화재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때때로 우리나라 문화재가 중국이나 일본의 것으로 둔갑하는가 하면, 어떤 경우에는 20세기 초에 제작된 것이 국보급 문화재로 잘못 알려지기도 한다.
'1965년 한·일 문화재협정'에 따라 우리 정부는 도쿄국립박물관 등 일본 정부가 소장하고 있는 문화재 1,326점을 반환받았다. 협상 과정에서 우리 대표자들은 협정 부속서(반환 목록)에 실린 '석조사자 2구'라는 문구에 감격했다. 이 석조사자는 도쿄국립박물관 기록에는 '獅子(사자): 李朝(이조)/80.0 × 79.7㎝'로 표현돼 있었는데, 그것은 다보탑 돌사자상을 연상하게 했다.
경주 불국사는 우리 문화의 상징이다. 불국사 다보탑의 돌사자상 3구가 일제 강점기에 약탈되었다는 이야기는 우리 국민의 분노를 가져왔고, 이러한 이유에서 협상 대표자들이 느꼈던 그때의 감격은 이해할 만했다.
하지만 돌사자상 반환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오히려 실망감으로 돌아왔다. 그 일면을 한국 고대사학자였던 김정학(1911~2006)의 경향신문 칼럼(1965년 8월 2일)에서 확인할 수 있다. 김정학은 “불국사 다보탑 돌사자로 알고 기뻐하였으나 중국 명대 석물이라는 것을 듣고 아연하여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당시 심정을 기록했다. 도쿄국립박물관은 우리 문화재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우리 정부는 한·일 정부협상 과정에서 제대로 된 실태조사 없이 일본 측 기록에 의지했다. 이로 인해 국립중앙박물관은 중국 명대의 돌사자상을 소장하게 되었다.
한국미술사학을 대표했던 황수영(1918~2011)에게도 국외문화재 실태조사에 대한 아픈 기억이 있다. 주일대표부(현 주일대사관)는 1959년 9월 17일에 한·일 관계 개선을 목적으로 일본 자민당 호시지마 지로의원에게서 한 점의 돌사자상을 기증받았다. 주일대표부는 이 돌사자상의 가치가 궁금했고, 황수영에게 실태조사를 맡겼다. 황수영은 같은 해 9월 30일 도쿄에서 돌사자상을 직접 실견했고, 10월 1일 보고서를 통해 “국보 35호 화엄사 사자상 3층 석탑과 아주 유사한 통일신라시대의 걸작이다. 제작 시기는 서기 9세기 초반으로 보인다”고 극찬했다.
하지만 3년 후, 황수영은 자신의 의견을 번복했다. 그가 화엄사를 방문하면서 화엄사 삼층석탑 돌사자상과 주일대표부 돌사자상이 모습뿐만 아니라 크기가 같다는 사실에 의심하기 시작했다. 1961년 12월 일본 도쿄를 방문했을 때, 조선 백자 연구가로 활동했던 아사카와 노리타카(1884~1964)로부터 화엄사 석탑을 모방하여 모조품을 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는 도쿄에 영친왕저택 건립을 기획하는데, 저택 정원을 장식할 목적으로 화엄사 석탑을 강제 이전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한국인의 반발을 우려하여 모조품 제작으로 변경한 것이다.
결국 황수영은 1962년 12월 '고고미술(통권 제29호)'을 통해 “주일대표부에 있는 돌사자상은 국보 35호 화엄사 석탑을 모방한 것이다. 사실과 다른 이야기를 해서 죄송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국미술사의 학문적 체계가 자리잡지 않았던 시절이었음에도 황수영은 자신의 과오를 바로 잡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선배 학자의 용기는 후학들에게는 국외 한국문화재의 자산으로 기억되고 있다.
2018년 6월 일본 국사학회대회(고대사분과)는 포르투갈 리스본의 국립고대미술관에 소장된 '금동반가사유상'으로 뜨거웠다. 이 불상은 영국 국적의 석유재벌 굴벤키안(1869~1955)이 1919년에 프랑스 파리의 경매소에서 구입하여 1952년에 미술관에 기증한 것이다. 미술관은 한국이나 일본에서 7~8세기 전후 제작된 진품으로 밝히고 있다. 일본 국학원대 교수가 2018년에 포르투갈을 방문하여 불상을 직접 본 후에 미술관 측 의견을 반영한 보고서를 일본 학계에서 발표했다. 반가사유상은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1883~1969)로부터 "인간 실존의 가장 완성된 모습"으로 평가된 후,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 문화재적 가치가 주목받았다.
포르투갈 측 기록에 의지한 일본 학자의 보고서는 비록 일본 학계의 주목을 끌었지만 우리 전문가의 평가까지 얻어내는 데는 실패했다. 이 불상은 우리나라 국보 반가사유상(국립중앙박물관 소장)과 비슷한 보관(寶冠ㆍ보살이 쓰고 있는 관)을 착용하는 등 유사한 형상을 보이고는 있으나 사실은 한·일의 불상 제작방식을 혼용하여 20세기 초에 일본에서 제작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은 전 유럽의 문화재를 약탈했다. 여기에 미술사학자나 박물관 학예사, 전문 감정인 등과 같은 독일 지식인들이 가담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힐데브란드 구를리트(1895~1956)다. 그는 나치를 위해 모네, 르누아르, 샤갈, 피카소 등의 비공개 작품 1,500여 점 이상을 보관했다.
실체가 드러난 것은 2012년의 일이다. 독일 세무당국이 아들 코르넬리우스 구글리트의 자택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전모가 확인된 것이다. 독일 정부는 몰수를 추진했으나 아들은 법원 소송으로 맞섰다. 2014년에 법원이 반환청구기한(30년)이 지났다는 이유로 아들의 승소를 결정했을 때 국제사회가 분노했다. 결국 부담을 느낀 아들이 스위스 베른시립미술관에 나치 수집품을 기증했고 베른시립미술관이 원소유자 반환을 발표하면서 사건은 정리되는 듯했다.
하지만 뜻밖의 문제가 한국문화재와 관련해 불거졌다. 독일분실예술품재단이 수집품 목록과 사진을 웹사이트에 게재했는데, 이를 눈여겨본 국내 언론이 두 점의 도자기를 ‘조선의 찻사발’로 보도한 것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의견은 달랐다. 두 점 모두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에 일본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았다. 도자기 하나는 기면에 남아 있는 도장의 글자 '蔵六(조우로쿠)'을 통해 일본 교토 지역에서 자리잡았던 마시미즈 조우로쿠 가문에서 제작한 것임을 알 수 있고, 또 다른 도자기는 특징적인 면에서 일본에서 ‘고혼’으로 불리는 다완 종류를 19세기에 재현한 것이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실태조사의 사전 준비부터 보고서 제작까지 전 과정을 14개 단계로 세분화하고 매뉴얼로 제작해 운영하고 있다. 결과는 가시적인 성과로 나타났다. 미국 미시간대 미술관에 소장된 우리나라 백자대접이 일본의 것으로 잘못 알려져 바로잡는가 하면, 미국 클리블랜드 미술관의 경우에는 일본이나 중국의 것이 우리 것으로 잘못 알려져 바로잡았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국제사회에서 한국문화재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빈약하다. 한국실을 운영하는 외국 박물관의 경우에도 한국 담당 학예사를 채용하고 있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외국 박물관의 전문 인력 부재는 국외 한국문화재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포르투갈 반가사유상이 유럽에서 한국 문화의 예술적 극치로 알려지는 것은 그 상상만으로 끔찍한 것이나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논어 학이편에는 노나라 출신 제자 유약의 ‘본립도생(本立道生)’이라는 말귀가 실려 있다. ‘기본이 서면 나아갈 길이 생긴다’는 뜻이다. 때때로 기본을 지키는 것은 고지식하거나 미련해 보일 수 있지만 일의 성패를 결정하기도 한다.
실태조사는 긴 시간 동안 무려 14단계나 거쳐야 하는 인고의 과정이다. 국외 한국문화재의 평가를 단번에 끌어올릴 수 있는 비책은 없다. 실태조사를 통해 하나, 하나 분석해 가면서 그 결과를 외국 박물관과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김정학과 황수영이 그날의 실망감과 자기 고백을 통해 남기고자 했던 한국미술사의 진정한 유산은 아니었을까. 실태조사야말로 기본 중의 기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