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동피랑마을, 부산 감천마을. 두 마을에 벽화가 칠해지지 않았더라면 그 많은 사람들이 기억할까. 충북 청주를 품은 우암산 중턱에 자리한 수암골도 마찬가지다. 전쟁 피란민들이 모여들면서 형성된 전형적인 달동네. 쇠락에 쇠락을 거듭하며 사람들의 기억과 시야에서 멀어지던 곳이었다. 그러나 2008년 공공미술 프로젝트가 이곳에서 진행되면서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10여 년, 수암골은 '청주 여행의 출발점'으로 자리 잡았다.
스러져 가던 회색빛 담장에 내려앉은 유채색 그림의 힘은 강했다. 푹푹 꺼져만 가던 마을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림 천국이 된 골목은 ‘추억의 장소’로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수암골은 동피랑·감천 마을에 견줄 전국적인 관광 명소로 떠올랐다.
물 좋고 산 좋은 청주의 이 벽화마을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드라마다. 1970년대 거리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한 이곳에서 ‘제빵왕 김탁구’ ‘카인과 아벨’ 등 인기 드라마가 잇따라 촬영됐다. 수십 편의 영화도 촬영됐고, 최근엔 한국 최초 드라마문학관까지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2019년부터 청주시가 수암골 일대를 ‘청주 드라마 거리’로 꾸미기 시작한 이유다.
청주시 상당구 충북진로교육원 옆길을 따라 우암산 쪽으로 발을 들이면 맨 먼저 오렌지색 건물과 마주한다. 드라마 거리 시작점인 ‘김수현 드라마아트홀’이다. 지난해 8월 국내 첫 드라마문학관으로 개관한 이 아트홀은 명칭 그대로 김수현을 주제로 한 곳이다.
청주 출신인 김수현은 드라마 대표 작가로 꼽힌다. ‘청춘의 덫’ ‘사랑과 야망’ ‘사랑이 뭐길래’ ‘엄마가 뿔났다’ ‘목욕탕집 남자들’ ‘인생은 아름다워’ 등 인기 드라마를 수없이 쓴 인물이다. 히트작과 명대사를 많이 남겨 ‘시청률 제조기’ ‘언어의 연금술사’로 통한다. 문화계에선 그를 ‘드라마 한류 열풍의 원조’라 부르기도 한다.
“인생은 순간 순간의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작가로서, 누구든 어떤 인간의 모습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다 가는가를 열심히 들여다봅니다.”
1일 아트홀 본전시실에 들어서자 들보에 적힌 김 작가의 어록이 눈에 띄었다. 내부엔 그의 50여 년 집필 인생과 작품 세계를 보여주는 대본, 영상물이 가득하다. 드라마 ‘세 번 결혼한 여자’의 주인공과 함께 사진을 찍는 포토존에선 50대로 보이는 여성이 셀카봉을 연신 누르고 있었다.
위층과 통하는 계단 벽면엔 유명 배우 사진을 담은 액자 수십 개가 걸려 있다. 모두 배우 본인이 직접 기증했다고 한다. 드라마 체험 공간도 있다. 연속극의 특정 부분을 발췌해 감상할 수 있고, 친구·가족과 함께 배역을 나눠 실제 촬영도 해볼 수 있는 곳이다.
‘수요드라마극장’은 아트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코너다. TV드라마를 영화처럼 극장에서 상영해주는 프로그램인데, 코로나19로 인해 운영을 잠시 중단한 상태다.
아트홀에서는 ‘포스트 김수현’을 찾는 시나리오 작가 교육도 진행하고 있다. 전국 공모로 선발한 30명의 작가 지망생에게 캐릭터 창조, 시놉시스 작성, 대본 쓰기 등을 현직 드라마 작가가 직접 가르친다. 천혜림 아트홀 전임은 “드라마 작가 발굴 프로그램이 반응이 좋아 내년부터 기초과정 2개 반, 실기 연수과정 1개 반으로 대폭 늘릴 예정”이라고 했다.
김수현 드라마아트홀에서 수암골 중심 구역까지, 약 500m 거리에는 드라마 광장, 드라마촬영 공원, 배우 조형물 공원 등 드라마와 관련한 공간과 시설물이 널려 있다.
비탈길에 삐딱하게 조성한 드라마 광장에는 최명길, 천정명, 도지원, 박민영 등 유명 탤런트들이 동판에 찍은 핸드 프린팅이 남아 있다. 이들 모두 청주에서 찍은 드라마의 주인공이다. 육각형의 대형 기둥에는 이들의 극중 대사가 적혀 있다.
드라마촬영 공원엔 드라마나 영화 촬영 현장을 동상으로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메가폰을 잡은 감독부터 카메라맨, 레디고를 외치거나 조명을 치켜든 스태프들까지 모두가 실제 드라마를 찍는 모습 같다. 공원 벽면에는 ‘은교’ ‘신세계’ ‘파바로티’ ‘조선미녀삼총사’ ‘가문의 귀환’ ‘부탁해요 캡틴’ 등 청주에서 촬영한 드라마·영화들을 그림과 함께 소개해놓았다.
길가의 작은 쌈지공원에도 온통 드라마 관련 조형물이 들어차 있다. 특히 ‘부탁해요 캡틴’의 주인공인 구혜선·지진희 커플이 다정히 앉은 동상, ‘카인과 아벨’의 주인공 소지섭이 고뇌에 찬 모습으로 책을 보는 동상이 포토존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이들 광장과 공원을 잇는 사이 사이에는 ‘옹벽 갤러리’가 조성됐다. 길가 옹벽에 카메라와 영화 필름, 드라마 장면 등을 형상화한 그림이 가득해 붙은 별칭이다.
드라마 거리 중심부에 자리한 팔봉제빵점은 ‘제빵왕 김탁구’의 주무대다. 이 드라마는 2010년 안방 극장에 찾아와 최고 시청률 50%를 기록하며 수암골을 단숨에 전국에 알렸다. 김탁구(윤시윤 분)가 하얀 밀가루를 뒤집어쓴 채 제빵왕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바로 그 제과점이다. 지금은 빵과 커피를 파는 카페로 운영 중이다. 물론 빵은 김탁구가 만든 게 아니고, 청주시내 S제과점에서 공급하는 것이다. 인근 국수전문점 ‘영광이네’ 앞에서 만난 김지숙(32)씨는 “드라마광인 엄마(63)와 함께 가끔 수암골에 놀러 와 빵도 사먹고 드라마 공원에서 사진도 찍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며 웃었다.
팔봉제빵점 맞은편의 구멍가게 ‘삼충상회’는 수암골 벽화마을 여행의 출발점이다. 여기부터 꼬불꼬불하고 울퉁불퉁한 골목이 실핏줄처럼 얽혔고, 골목을 이룬 건물 외벽과 담벼락에 화사한 채색화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 수암골 벽화의 특징은 아이들을 소재로 한 그림이 많다는 점이다. 골목길에서 술래잡기·말타기 놀이하는 산동네 아이들, 기차놀이하는 꼬맹이, 오줌 싸는 녀석 등 그림 속 아이들의 모습과 표정도 가지가지다. 골목 안에 서자 어디선가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동심의 세계로 빠져드는 시간이다. 지붕 모양과 색깔도 다르고 출입문·창문도 상이한 아담한 가옥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집집마다 개성 만점의 소품들로 장식을 했는데, 연탄에 웃는 얼굴을 그린 작품이 한눈에 다가왔다.
골목을 따라 산 위로 계속 오르다보면 끝자락에 수암골전망대가 나온다. 청주시내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최고의 조망 장소다. 2층으로 구성된 전망대에도 배우 조형물이 서 있다. 드라마 ‘힐러’의 주인공 지창욱이다. 이 전망대는 수암골 골목을 통해 오를 수 있고, 우암산 순회도로를 이용해 차량으로 접근할 수도 있다. 밤엔 산아래 고층 빌딩과 루프톱 카페들의 조명이 어울려 화려한 야경을 선사한다.
청주 드라마 거리는 김수현 드라마아트홀~팔봉제빵점~청주대 중문까지 총 1.3km다. 하지만 골목이 복잡하고 길가에 볼거리·체험거리가 많아 실제 걷는 거리는 3~4km에 이른다. 여행객에게 불편한 점은 거의 없는 편이다. 거리 곳곳에 식당, 카페가 즐비하고 공용주차장, 공중화장실 등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청주시는 ‘드라마 도시’를 향한 더 큰 걸음을 준비하고 있다. 드라마 거리에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확충하고, 김수현 드라마아트홀의 교육·체험 프로그램을 다양화할 계획이다. 나아가 수암골 일대를 한국을 대표하는 드라마 테마파크로 조성하는 사업도 구상하고 있다.
안승현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문화산업2팀장은 “수암골은 공공예술을 통한 도시재생 마을에 드라마를 입힌 곳”이라며 “K드라마 중심지로 키우기 위해 지역 작가를 양성하고, 드라마를 산업화하는 묘안을 짜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