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뒤흔든 제사 거부… 천주교 첫 순교자 윤지충 권상연 유해 발견

입력
2021.09.01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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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친상을 치르면서 제사를 거부하고 조상들의 신주를 불태웠던 한국 천주교의 첫 순교자 윤지충(1759~1791)과 권상연(1750~1791)의 유해가 전북 완주군에서 발견됐다. 충효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던 유교사회의 윤리를 저버렸다는 이유로 처형당한 지 230년 만이다. 윤지충의 동생으로 신유박해 때 순교한 윤지헌(1764~1801)의 유해도 함께 확인됐다.

천주교 전주교구는 3월 전북 완주군의 초남이성지를 정비하다가 무연고 분묘에서 유해들을 발굴했고 유전자 검사를 비롯해 해부학적, 고고학적 정밀감정을 실시한 결과 일부 유해의 신원이 윤지충을 비롯한 순교자 3인으로 확인됐다고 1일 밝혔다. 천주교 순교자 가운데 유해가 확인된 경우는 드물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4년 5월 서울에서 성인으로 시성한 103명 가운데서는 27명의 유해만이 확인됐다.


천주교 전주교구장 김선태 주교는 이날 “본 주교는 이 유해들이 한국 최초의 순교자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 신유박해 순교자 복자 윤지헌 프란치스코의 유해라고 선언하며, 이에 반대되는 모든 것을 배척한다”는 내용의 교령을 발표했다.

유해들과 함께 발견된 유물들이 신원을 확인하는 실마리가 됐다. 10기의 무덤 가운데 3호와 5호 무덤에서는 윤지충과 권상연의 이름과 자, 출생연도 등을 담은 명문이 새겨진 백자사발지석이 출토됐다. 윤덕향 전 전북대 고고인류문화학과 교수가 참여해 묘소를 정밀조사하고 출토물을 방사성탄소연대측정한 결과, 묘지의 조성과 출토물의 연대가 윤지충과 권상연이 처형당한 1791년와 비슷한 시기인 1700년대 말에서 19세기 초로 나타났다고 전주교구는 밝혔다.





이어 송창호 전북대 의대 교수가 유골을 해부학적으로 검사한 결과, 유해들은 모두 남성이었고 참수형에 해당하는 소견들이 확인됐다. 특히 8호 묘지에서 발굴된 유해에서는 조선시대 형벌의 하나인 능지처사의 흔적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Y염색체 부계확인검사에서는 이들의 유전정보가 각각 해남 윤씨와 안동 권씨 친족 남성 5명의 유전정보와 일치한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이번에 유해가 발굴된 윤지충은 전라도 진산(현 충남 금산)에서 태어난 양반으로 조선 종교사에 커다란 파문을 남겼다. 윤지충은 1783년 무렵 고종사촌이었던 정약용을 통해서 천주교를 접하고 독학으로 신앙을 가졌다. 이후 1791년 모친이 사망하자 장례는 치렀지만 신주를 세우지 않았고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이어서 외사촌 권상연과 함께 사당에 보관하던 조상들의 신주를 불태우기까지 했다. 불경한 소문은 곧 조정에 전해졌고 이들은 곧 체포돼 처형당했다.

역사학계에서는 윤지충이 신주를 불태우는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1790년 베이징에 머물던 구베아 주교가 조선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기는 했지만 조선에는 성직자가 한 명도 없던 상황이기 때문이다. 정조대에 책을 통해서 조선에 유입된 천주교는 외부의 포교가 아닌 자생적 연구모임을 통해서 신앙으로 거듭난다. 더구나 당시의 양반들에게 제사는 단순한 예식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장손이 진행하는 제사는 유교적 질서를 지탱하는 핵심 의례이자 종교적 행사였다. 신주는 조상의 혼백이 깃드는 중요한 물건이기도 했다. 제사와 신주를 거부한다는 것은 양반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윤지충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종교관을 드러낸다. 2019년 발표된 '정조의 천주교 인식 배경과 진산사건의 정치적 함의' 논문에 따르면 윤지충은 “사대부 집안의 신주는 천주교에서 금하는 것이니 차라리 사대부에게 죄를 얻을지언정 천주에게 죄를 얻고 싶지는 않았다”라는 생각을 밝혔고 그 사실이 사건을 조사한 전라도 관찰사의 보고에 담겼다. 또 윤지충이 “신주들은 나무로 만든 것이고 그것들은 저와는 살이나 피나 목숨으로 아무 관계가 없다. 거기에는 제 부모의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라고 말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두 사람이 뜻을 굽히지 않자 정조는 강상의 윤리를 저버렸다는 이유로 처형을 명했고 윤지충과 권상연은 1791년 11월 전주 남문 밖에서 참수당한다. 이것이 바로 조선의 첫 천주교 박해인 진산사건으로 제사 거부는 이후로도 여러 차례 박해의 근거가 된다. 정치적인 파장도 컸다. 서인들은 이 사건을 두 사람이 속한 남인을 공격하는 무기로 삼았다.

조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진산사건을 통해 조선의 사대부들은 천주교를 믿는 유학자들이 제사를 거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면서 “진산사건은 조선사회와 천주교가 적대적 관계로 돌입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현재의 천주교는 조상 숭배가 아닌 효성과 추모의 전통문화를 계승하는 차원에서 제사를 허용하지만 동서양이 서로를 존중하는 관계에 이르는 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전주 김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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