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물고문’ 없이 넘어가나 싶던 울산 반구대암각화가 여름 끄트머리에서 ‘복병’을 만났다. 태풍 오마이스의 북상과 함께 시작된 가을장마다. 해마다 반복되는 침수로 훼손 우려가 제기되지만, 대책은 20년 넘게 지지부진하다.
31일 울산시에 따르면 이날 오후 2시 30분 현재 울주군 언양읍 사연댐 수위는 54.9m다. 사연호 상류에 있는 반구대암각화는 댐 수위가 53m에 이르면 물에 닿기 시작하고, 57m가 되면 완전히 잠긴다. 댐 만수위는 60m다.
울산시 관계자는 “태풍 오마이스가 뿌린 비로 지난 24일 새벽 댐수위가 53m를 기록했고, 그 뒤로도 가끔 내린 비 때문에 수위가 좀처럼 내려가지 않고 있다”며 “한여름 장마 때도 물에 잠기지 않았던 반구대암각화가 처음으로 물에 잠긴 뒤 1주일째 침수 상태에 있다”고 말했다.
한국수자원공사는 9월 7일쯤 사연댐 수위가 내려갈 것으로 예상하지만, 울산 지역에 9월 3일까지 요란한 비가 예고된 점을 감안하면 암각화의 침수 기간은 더 길어질 가능성이 크다.
국보 제285호 반구대암각화는 높이 2.5m, 너비 9m 바위벽에 고래와 호랑이, 사슴 등 300점이 새겨져 있다. 6,000년 전 선사시대 생활상 등을 잘 담고 있어 인류 최초 기록 유산으로 꼽힌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에 따르면 반구대암각화의 경제적 가치는 2009년 기준 연간 4,926억 원으로 국내 문화재 중 최고다.
이 같은 가치에 비해 암각화가 처한 현실은 암울하다. 침수가 반복될수록 부식과 풍화작용으로 인한 훼손도 빨라질 수밖에 없지만, 발견 뒤 수십 년째 이렇다 할 조치가 취해지지 않고 있다. 해마다 암각화는 물에 잠겼다 드러나기를 반복했고, 지난해 7월부터 10월까지 침수된 것을 비롯해 최근 3년간 연평균 69일을 물속에서 보냈다.
이에 대해 시 관계자는 “울산시민의 식수원인 사연호의 사연댐은 자연월류형 댐”이라며 “물이 가득 찰 때까지 가둬둘 수밖에 없는 구조에 기인한다”고 말했다. 홍수 조절 능력이 없는 댐이어서 현 상황에서는 손쓸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대책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연댐에 수문을 설치해 수위를 53m 이하로 유지하는 방법이 있다. 울산시는 지난 5월부터 이와 관련한 ‘사연댐 여수로 수문 설치 타당성 조사 용역’에 착수해 11월 결론을 앞두고 있다. 계획대로라면 2024년 수문 설치 작업이 완료된다.
문제는 이 같은 조치로 호수의 담수 능력 감소가 불가피하고, 이에 따라 울산시민이 쓸 식수가 줄어든다는 데 있다. 이를 위해 정부가 마련한 ‘낙동강 통합물관리 방안’에 따라 경북 청도 운문댐에서 끌어오는 방안이 유력하게 검토되고 있지만, 이 방안은 검토만 반복되고 있을 뿐, 구체적인 방안은 논의되지 않고 있다.
이 같은 답답함을 알리기 위해 송철호 울산시장은 이날 암각화 현장에서 보존 대책 관련 기자회견을 계획했다가 우천으로 취소했다. 시 관계자는 "가을장마가 끝나면 낙동강 통합 물관리 사업이 조속히 추진되도록 촉구하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열 예정"이라고 말했다.
임현수 부산대 지질환경과학과 교수는 “암각화의 문화재적 가치는 세계유산급”이라며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