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육군 82공수사단장 크리스 도나휴 소장이 마지막으로 올라탄 미 공군 C-17 수송기가 30일 오후 11시 59분(현지시간) 아프가니스탄 카불 공항을 이륙했다. 30년째 야전을 누비고 있는 백전노장 도나휴 소장이 개인화기를 지니고 굳은 표정으로 수송기에 오르는 야간 투시경 사진이 아프간 전쟁사의 최후 장면으로 기록됐다. 미국이 애초 발표했던 철군 시한(31일)보다 하루 앞선 전격적인 철수 완료였다. 아프간을 장악한 탈레반은 카불 시내에서 허공으로 총을 쏘며 미군 철수를 기뻐했다. 2001년 9ㆍ11테러로 촉발돼 20년간 진행됐던 미군의 최장기 전쟁, 아프간전이 허무하게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미국은 침공 목표였던 9ㆍ11테러 배후 알 카에다 궤멸과 수장 오사마 빈라덴 사살에는 일정 부분 성공했다. 하지만 길어지는 전투 속에 전쟁의 목적은 희미해졌다. 아프간 국가 재건, 민주주의 정착, 인권 증진이라는 소중한 구호도 제대로 결실을 맺지 못했다.
결국 20년 전으로 돌아가 다시 탈레반이 장악한 아프간만 남긴 채 미국은 허둥지둥 카불을 떠나야 했다. 전쟁을 일으킨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부터, 무의미한 전쟁을 질질 끌었던 버락 오바마ㆍ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전쟁은 끝냈지만 전황 오판으로 외교 리더십에 상처를 입은 조 바이든 대통령. 미국 안팎에서 책임론 비판도 거세지고 있다.
미군에서 아프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와 중동 작전을 관할하는 케네스 매켄지 중부사령관은 이날 오후 국방부 화상 브리핑에서 “아프간 철군과 미국인, 제3국 국적자, 아프간 현지인 대피 임무가 완료됐다”고 밝혔다. 마지막 미군 수송기 5대가 카불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을 이륙하고 1시간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는 “지난 14일부터 오늘까지 미군 역사상 최대 규모의 비전투원 철수 작전을 수행했다”고 강조했다. 15일 아슈라프 가니 아프간 정부가 항복을 선언하면서 탈레반이 카불을 장악한 뒤 속도를 낸 미군 철수 작전 결과 12만3,000명의 미국인, 동맹ㆍ우방국 관계자, 아프간 협력자가 현지를 빠져나왔다.
바이든 대통령도 성명을 내고 “이제 20년간의 아프간 주둔은 끝났다”라고 선언했다. 그는 31일 오후 기자회견을 통해 아프간 철군 결정을 고수한 이유를 설명할 예정이다.
앞서 2001년 10월 시작된 아프간 전쟁은 두 달 만에 탈레반 정권 붕괴와 과도정부 수립이라는 승전보를 울렸다. 하지만 탈레반의 저항이 이어지면서 미군 피해도 속출했다. 2011년 5월 빈라덴 사살로 전쟁의 목표는 달성됐으나 미국은 철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수렁에서 허덕였다.
결국 지난해 2월 트럼프 전 대통령이 탈레반과 2021년 5월 철군에 합의했다. 지난 1월 취임한 바이든 대통령도 이 기조를 이어 받아 4월 9ㆍ11테러 20주년 이전에 미군 철군을 마치겠다고 밝혔다. 7월에는 8월 31일을 미군 철군 시한으로 확정했고 이날 철수를 완료한 것이다.
미국이 잃은 게 많은 전쟁이었다. 아프간에 1조 달러(약 1,165조 원)를 쏟아 부었지만 경제 재건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일상화한 부정부패 속에 일부 아프간 관료와 군산업체 배만 불렸다. 830억 달러를 투입해 아프간 보안군을 훈련하고 지원했지만 대부분의 군사 장비는 탈레반 손에 고스란히 넘어갔다.
4월 기준 아프간전쟁 희생자는 약 17만 명에 달한다. 아프간 군경(6만6,000명)과 민간인(4만7,000명), 탈레반 반군(5만1,000명) 등이 사망자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미군 전사자도 2,461명에 이른다. 특히 철수 작전 막바지였던 26일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세력인 이슬람국가 아프간지부 호라산(IS-K)의 카불 공항 자살폭탄 테러로 미군 13명 등 170여 명이 숨지기도 했다.
15일 예상보다 빨리 아프간 정권이 붕괴하면서 쫓기듯 아프간을 떠나는 모습이 연출된 것은 바이든 대통령에게 치명타였다. ‘제2의 베트남전쟁 패배, 사이공 함락’이라는 조롱이 이어지면서 지지율도 떨어졌다. 철군 일정 고수 전략이 유연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쏟아졌다. 친미 성향 가니 정권이 최소 연말까지는 버틸 것으로 오판했던 바이든 행정부의 실책이라는 비판이었다.
게다가 6,000여 명의 미국인이 지난 2주 사이 철수했지만 아직 아프간에 100~200명의 미국인이 남아 있다는 점도 바이든 행정부에는 큰 부담이다.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은 기자회견에서 “(최종 철군으로) 미국의 아프간 관여라는 새로운 장이 열렸다”며 “군대의 임무는 끝났고 우리의 외교가 주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탈레반과의 외교관계 재설정이 미국의 우선 과제가 될 전망이다. 미국은 이미 탈레반이 과거와 같은 여성ㆍ인권 탄압을 하지 않을 경우 제재 해제 및 관계정상화도 가능할 수 있다는 여지를 둔 상태다.
하지만 20년 이상 미국과 앙금이 쌓인 탈레반이 대화의 문을 닫을 경우 미국은 뾰족한 대안이 없다. 아프간의 불확실성이 증폭된다면 중국 러시아 이란 인도 등 주변 강국 국내외 정세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이 돌아왔다’고 외쳤던 바이든 식 동맹외교를 회복하고 IS-K 등 테러 세력 득세를 저지해야 하는 과제도 미국이 떠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