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근본주의 무장조직 탈레반은 31일(현지시간) 아프간 전역을 장악하고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미군이 철수 완료를 선언한 직후 나온 '독립 선언'이다. 미국이 '영원한 전쟁'을 끝내고 아프간을 떠나면서 탈레반은 이제 이 나라의 실질적 통치 세력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자비훌라 무자히드 탈레반 대변인은 이날 "공항 통제는 탈레반 손에 맡겨졌고, 이제 새로운 정부를 구상 중"이라고 설명했다.
현지는 축제 분위기다. 탈레반 대원들은 자정쯤 마지막 미군기가 공항을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며 승리를 자축했다고 AP통신은 전했다. 카불 공항과 시내 곳곳에 승리를 축하하는 총성이 울려퍼지기도 했다. 탈레반 부지도자 시라주딘 하카니의 동생 아나스 하카니는 자신의 트위터에 "우리는 역사를 다시 만들었다"며 "20년간의 지하드(성전)와 희생, 고난 끝에 자부심을 갖고 역사적인 순간을 보게 돼 매우 기쁘다"고 언급했다.
잔뜩 고무된 탈레반은 카불에 유엔이 통제하는 '안전지대'를 설치하자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제안도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수하일 샤힌 탈레반 정치국 대변인은 프랑스앵포 라디오 인터뷰에서 "프랑스나 영국에 그런 지대를 만들 수 있느냐"고 반문하며 "아프간은 독립국이기 때문에 안전지대 설치는 불필요하다"고 못박았다.
아프간 전역이 공식적으로 탈레반 통제 하에 들어가면서 국제 사회는 잔뜩 긴장한 모습이다. 미 연방항공청(FAA)은 카불 공항이 '미통제 상태(uncontrolled)'라는 공지를 각 항공사에 전달했다. FAA는 "카불 공항에는 항공 교통 관제 서비스가 없는 상태"라며 "카불에 착륙하거나 아프간 상공에서 운항 중인 항공기는 '극도의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단 20년만에 자력으로 영토를 운영하게 됐지만, 새 점령자의 앞날은 그야말로 '안갯속'이다. 국제사회가 '탈레반의 아프간'을 선뜻 인정해주지 않는 상황에서, 국내 여러 난제 역시 뾰족한 해결책을 찾기 쉽지 않은 탓이다. 일단 이들은 '정상 국가'를 희망하며 새 정부 구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인권 보호, 개방적 정부 구성, 국제사회와 교류 희망 등 유화적 메시지도 쏟아냈다. 샤리아법(이슬람 율법)을 통치의 근간으로 삼되, 여러 종족을 두루 아우른 포용적 정부를 추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아프간 현지를 비롯해 국제사회에는 이를 '믿을 수 없다'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이미 곳곳에서는 부르카(얼굴까지 검은 천으로 가리는 복장)를 쓰지 않고 외출한 여성을 총살하는 등 여성 인권이 무너지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사면령에도 불구하고 탈레반이 전 정부 및 외세 '부역자'를 색출하는 데 혈안이라는 보도도 이어지고 있다. 아랍권 매체 알 자지라는 최근 탈레반이 정권 안정을 이루려면, 이른 시일 안에 국민의 '공포'가 아니라 '인정'을 끌어내야 한다고 분석했다.
10만 명도 안되는 탈레반 병사로 아프간 전국을 통치하는 것도 과제다. 아프간의 인구는 약 4,000만 명에 달한다. 특히 탈레반 전사 대부분이 숫자조차 읽거나 쓸 수 없는 문맹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인력난'은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무자히드 대변인이 지난 24일 "미국이 아프간 내 숙련된 기술자와 전문가들을 데려가고 있다"고 비판한 것도 것도 이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최악으로 치닫는 현지 경제 상황은 가장 큰 고민거리다. 탈레반이 아프간을 장악하자마자 물가는 폭등했고 실업자는 늘어나는 등 실물 경제는 바닥으로 가라앉는 분위기다. 여기에 미국은 아프간으로의 달러 송금 등을 금지했고, 미 연방중앙은행 등에 예치된 90억 달러 규모 아프간 중앙은행 외화 자산에 대한 탈레반의 접근도 차단됐다.
미군 철수 후 고개를 드는 또 다른 극단주의 세력 이슬람국가 호라산(IS-K)과의 갈등도 탈레반에는 큰 부담이다. 그간 탈레반과 대립 관계였던 IS-K는 최근 카불 공항 폭탄 테러를 주도하며 본격적인 반(反)탈레반 세력을 규합, 탈레반과 본격적인 주도권 경쟁에 나서는 양상이다. 탈레반으로서는 통치 체제 구축과 함께 내부의 적과도 싸워야 하는 힘겨운 상황을 만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