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좀 괜찮아요? 아팠던 거"라고 나에게 물어봐 주었던 드라마가 있다. '너는 나의 봄'은 상처입은 어린아이들을 마음에 품고 멀쩡해 보이는 얼굴로 살아가려 무진장 애쓰고 있는 어른들에게 이젠 좀 괜찮은지, 꼭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다른 어리고 여린 생명들처럼 아이도 꿈을 꿨고 기댈 곳을 찾았다. 다른 점이 있었다면 아이의 꿈은 공주가 아니라 옆집 딸이 되는 것이었고, 아이가 기다리는 구원자는 백마 탄 왕자님이 아니라 가장 무서운 일이 생긴 순간 자기를 위해 울어 줄 검은 고양이였다는 것." 이런 소망을 가질 만큼 일상이 고통스럽고 상처투성이였던 주인공 다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보살피고 배려하는 것이 기본인 직업을 가진 멀쩡한 어른으로 성장했지만, 그 마음속에는 여전히 상처받은 일곱 살짜리가 '목구멍에 걸린 칼'처럼 말로 꺼내지도 못한 채 과거를 짊어지고 있었다.
가까운 주변 사람들만 보아도 과거의 상처와 트라우마가 없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 하지만 자신의 트라우마와 상처를 대하는 방식은 너무나도 다르다. 많은 경우 과거가 자신에게 얼마나 지독한 흉터를 남겼는지조차 정확히 알지 못한 채 대충 묻어버리고 돌아보지 않으려 애쓰며 살거나,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처럼 변해가거나 아니면 대체 "몇 번이나 나는 나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던" 것인지 우리는 과연 알고 있기나 할까.
마음의 상처를 가진 이들에게 위로를 전해야 할 순간들이 있다. 하지만 '다 괜찮아질 거야'라는 말은 위로가 되지 않을 때가 많다. 괜찮아지지 않는 상처도 있으니까. 쉽게 건네는 '힘내, 파이팅'이라는 말도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너무 많이 다쳐서 마음에 전신 골절상을 입은 사람에게 힘을 내라고 말하는 건 한편으론 잔인하기도 하다. 이렇게 어려운 위로를 '너는 나의 봄'은 이렇게 잘 크느라 애썼다고, 매순간 반짝이지 않아도 괜찮다고 토닥토닥 관객에게 전한다.
극 중 영도는 말한다. "사람을 살리는 건 그런 거예요. '내가 네 이야기를 들어줄게' '내가 네 앞에서 무슨 말이라도 해 줄게' '네가 혼자 있게 두지 않을게' '내가 널 지켜보고 있을게'. 세상이 너무 깜깜해서 다 놓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깜빡거리는 불빛 하나만 보여도, 멀리서 지켜보기만 해도, 손끝만 살짝 닿아도 그걸로 충분하거든요." 어쩌면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그 작은 불빛 하나만큼의 마음만 어렴풋이 전달해도 우리는 그 힘든 순간을 버텨낼 수 있는 것 아닐까. 고정희 시인의 시 '천둥벌거숭이 노래 10'의 "그 한번의 따뜻한 감촉 /단 한번의 묵묵한 이별이 /몇 번의 겨울을 버티게 했습니다"처럼 말이다.
지난 화요일에 종영한 이 드라마의 시청률은 높지 않았고, 멜로와 스릴러 장르의 결합이 매끄럽지 않았다는 평도 있었다. 이 드라마가 시청자들이 기대했던 무언가를 주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드라마가 스토리 구성의 탄탄함 혹은 장르적 완성도와는 다른 방식, 다른 호흡으로 보아야 하는 드라마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등장인물들의 삶을 사로잡고 있는 상처와 트라우마를 헤아리며 그들의 아픔을 느끼고, 나아가 관객인 나 자신에게도 네 안의 어린아이는 좀 어떠냐고 물어보는 기회를 주는 것만으로도 이 드라마의 의미로는 충분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