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현관에 들어선 뒤 오른쪽에 보이는 16.52㎡(다섯 평) 남짓 되는 공간이 열 여섯 살 혜린이(가명)의 방이었다. 그날 이후에도 혜린이 방문은 늘 열려 있다. 둘도 없는 친구였던 고양이가 오늘은 혜린이가 돌아왔는지 확인하기 위해, 가족들이 혜린이와 매일 인사하기 위해 문은 열려 있어야 했다.
동물 인형, 수국, 빨대가 꽂혀 있는 버블티, 구운 아스파라거스, ‘솔의 눈’ 음료수, '수미칩' 과자, 그리고 초콜릿까지. 방에는 생전 혜린이가 좋아하는 것들이 가득하다. 특히 침대 머리맡에 놓인 토끼인형은 혜린이 엄마에겐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어머니'라는 호칭을 배워온 뒤 더 이상 딸에게서 '엄마'라는 말을 듣지 못했던 혜린이 엄마. 마지막 어린이날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던 지난해 5월 5일 "엄마라고 부르면 토끼인형을 사주겠다"고 약속한 것도 딸과 멀어지고 싶지 않았던 엄마의 바람 때문이었다.
혜린이 부모는 퇴근 후 귀가할 때마다 혜린이 방 화장대에 딸이 좋아했던 것들을 놓아둔다. 엄마 품에 원숭이처럼 매달리던 딸은 이제 없어졌고 '까르르' 웃던 딸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휑한 방이지만, 이것이 지금 혜린이 부모의 유일한 낙이다. 그것은 세상을 떠난 딸이 돌아오길 기도하며 돌무더기 탑을 쌓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혜린이 방 옷걸이 밑에는 '혜린이의 꿈'도 함께 잠들어 있다. 혜린이는 2019년 7월 일기장에 ‘메이크업 학원 다니기'를 적으며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될 꿈을 키웠다. 메이크업 박스는 혜린이가 떠난 순간부터 빛을 잃은 채 주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해 9월 27일. 아빠가 평소 눈여겨봤던 아크메드라비 후드티를 사 주자 뛸 듯이 기뻐했고, 외출하기 전 엄마와 김장을 하면서 수다를 떨던 딸. 그러나 저녁에 귀가한 뒤 현관 앞에서 엄마 품에 안겨 울다가 딸은 방에 들어가 문을 잠가 버렸다.
‘많이 속 썩이고 그랬는데 너무 죄송해요. 다음에 엄마 딸로 태어나면 이 기억 간직하고 속 안 썩이고 같이 백화점도 가고 같이 놀러도 가고 엄마가 하고 싶어했던 것들 다 할게요. 눈 뜨고 죽는 건 무서우니까 이불 좀 챙겨 갈게요.' 죽음을 앞두고도 두려움을 떨치지 못했던 혜린이는 그렇게 유서를 남기고 방에서 사라졌다.
성폭행 피해에도 이름과 휴대폰 번호까지 바꾸며 삶에 의지를 드러냈지만 또래 학생들의 2차 가해로 극단적 선택을 한 혜린이. 그런데도 법원은 선고 직전 가해자들을 소년부로 송치해 이들은 형사처벌을 면하게 됐다.
혜린이가 죽고 11개월이 지났지만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혜린이 부모의 시간도 여전히 그날에 멈춰 있다.
'삐삐삐삐…' 현관 도어록 소리가 들리면 혜린이 엄마는 자기도 모르게 "혜린이 들어왔니?"라고 말한다. 혜린이가 들어올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엄마는 매번 눈물을 쏟아내기 일쑤다. 가족들도 막내딸이 없는 현실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엄마의 슬픔이 너무 크다 보니 억누르며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엄마에겐 주변의 모든 풍경에 딸의 그림자가 남아 있다. 딸이 세상을 떠난 지 39일째인 지난해 11월 5일 퇴근 후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던 중 공원의 정자가 눈에 들어왔다. 혜린이와 엄마가 저녁에 함께 줄넘기를 하던 곳이다. 엄마는 정자에 앉아 휴대폰으로 혜린이 언니가 줄넘기하는 동영상을 재생했다. 줄넘기하는 언니 뒤에서 숫자를 세는 혜린이 모습을 보고 엄마는 한참을 흐느꼈다.
퉁퉁 부은 눈으로 고개를 들어 주변을 돌아보니 혜린이를 마중하기 위해 기다렸던 벤치가 보였다. 늦은 시간 함께 달리기를 했던 시냇물 공원과 떡볶이를 사먹었던 상가도 그대로였다. 주변은 여전히 딸과 함께 있었던 그대로인데, 혜린이만 이 세상에 없었다. 그래서일까. 엄마는 혜린이가 잠든 납골당을 자주 찾는다. 딸이 없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딸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예고 없이 접한 딸의 죽음 이후 엄마는 끊임없이 후회하고 자책했다. '가해자들이 있는 공간에서 딸을 구해올걸' '그날 문 앞에서 울고 있는 딸을 좀 더 안아줄걸' '딸이 방문을 닫지 못하도록 할걸' '구급차에 함께 타서 너가 돌아올 수 있도록 외칠걸'…. 엄마는 2020년 9월 27일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분명 딸을 살렸을 것이다.
후회와 자책은 곧장 딸에 대한 미안함으로 이어진다. 엄마가 그날 이후 펜으로 꾹꾹 눌러 쓴 일기장에는 '혜린아, 엄마가 미안해'라는 말이 수없이 적혀 있다. 세상에 언제나 네 편이 있다는 말을 더 많이 해주지 못했던 것. 딸이 그토록 좋아했던 고양이를 한 마리 더 입양하지 못했던 것. 여행 가자는 혜린이에게 '코로나 끝나면'이라며 연기했던 것. 노래방 한 번 같이 가지 못했던 것까지. 혜린이가 그토록 두려움에 떨면서 세상을 등진 것도 엄마는 자신의 탓으로 돌렸다. 정작 혜린이를 극단적 선택으로 내몬 가해자들은 사과 한마디 없는데, 엄마는 딸에게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극단적 선택을 하기 직전 '엄마아빠의 딸로, 언니의 동생으로 살아서 행복했다'는 메시지를 남길 정도로 가족을 사랑했던 열여섯 살 혜린이. 그런 딸의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좀 더 챙기지 못했다는 자책감은 엄마를 더욱 힘들게 했다. 가해자들이 합당한 처벌을 받게 되면 비틀어진 삶의 궤도가 조금이나마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겠지만, 그것은 욕심인 것 같았다.
'강간인 줄 몰랐다. 두 번 다시 협박도 하지 않겠다.' 2019년 11월 혜린이 엄마가 다락방에서 우연히 본 딸의 페이스북 메시지였다. 충격이 컸지만 그즈음 딸에 대한 성폭행 사건이 터지면서 엄마는 고민 끝에 이 사건을 묻어두기로 했다. 혜린이도 2019년 자신의 일기장에 '가족들에게 말 안 한 비밀' '내가 평생 말 못하고 가져가야 할 비밀' '말하고 싶지만 듣고 난 다음의 반응이 감당이 안 될 것 같은 비밀'이라고 적으며, 해당 사건을 부모에게 말하지 않았다.
혜린이 부모는 딸과 재회하게 되면 떳떳하고 싶었다. 딸을 위해 최선을 다한 부모로 인정받고 싶었다. 그래서 그간 묻어뒀던 이 사건을 경찰에 알리기로 했다. 혜린이 엄마아빠는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결론 내렸다. 지난 2월 한국일보를 통해 '혜린이의 비극’(관련기사 ☞[단독] 이름·번호 바꾸며 삶에 의지 드러냈는데... 가해자 선고 직전 극단 선택)을 접한 친구들이 해당 사건에 대해 증언하겠다고 나섰다.
경찰 역시 6월 수사에 착수해 가해자로 지목된 남학생과 참고인들을 불러 조사했다. 경찰에 고소장을 제출하기에 앞서 혜린이 엄마는 “나중에 죽어서 혜린이를 만날 때 ‘엄마, 나 그때 너무 힘들었는데 왜 안 도와줬어’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다. 딸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딸의 죽음을 가슴에 묻지 않고 끝까지 진실을 밝히려는 엄마의 마음이란 무엇일까. 혜린이 엄마는 시의 한 구절과 비슷한 말을 했다. “지금도 집안 모든 것이 혜린이가 있었던 그대로예요. 아이가 썼던 수저도, 아이가 썼던 머그컵과 칫솔도 그 자리에 있어요. 그게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어떻게 혜린이를 가슴에 묻을 수 있겠어요.” 엄마는 오늘도 혜린이 방을 찾아가 딸에게 인사한다. "엄마가 너무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