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꽃 같은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 학생이 교육부 집계 기준으로 148명에 달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등교 제한과 원격수업 병행 실시로 학생들 간 대면 접촉이 줄어들었음에도, 극단적 선택을 한 학생들은 2011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주목할 점은 교육부 통계상으론 자살한 학생 148명 중 '학교폭력·집단괴롭힘'을 원인으로 숨진 학생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학교 폭력과 사이버 불링(Cyber Bullying·온라인에서 특정인 대상 집단적·지속적·반복적 모욕·따돌림·협박 행위)을 못 견디고 극단적 선택을 한 학생들이 적지 않은데도, 정부는 그렇게 숨진 학생이 없다고 보고 있는 셈이다.
한국일보가 24일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교육부의 ‘학생 자살 현황’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학생은 모두 148명으로, 평균 5일에 2명꼴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나타났다. 2011년 150명에서 2015년 93명으로 감소했지만 2016년 108명, 2017년 114명, 2018년 144명, 2019년 140명으로 증가세로 돌아서더니, 지난해에는 2011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안타까운 희생이 늘어나고 있지만, 교육부는 자살 학생들의 숫자만 집계할 뿐, 이들이 왜 극단적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선 분석하지 않고 있다. '추정 원인별 학생 자살 현황' 자료에 따르면 2016~2020년 극단적 선택을 했다고 집계된 654명 중 235명(35.9%)이 원인 미상으로 나타났다. 정부는 숨진 학생 3명 중 1명은 왜 죽었는지 파악조차 못 하고 있었던 셈이다.
교육부 통계의 부실함은 또래 집단의 사이버 불링으로 지난해 9월 스스로 생을 마감한 장혜린(가명·16)양 사례(관련기사 ☞법원, 죽은 혜린이 아닌 가해자들 감쌌다... 형사처벌 면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혜린이가 집단 괴롭힘과 학교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숨진 게 명백한데도, 교육부 통계상으론 원인 미상으로 분류돼 있다.
교육부 관계자는 "학생들이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경우, 교사가 일주일 이내에 교육청에 보고하는 게 원칙이다. 원인을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해 일단 '원인 미상'으로 보고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더 큰 문제는 한번 '원인 미상'으로 보고되면, 이후에 원인이 밝혀져도 반영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혜린이가 생을 마감한 뒤 가해 학생들이 수사기관 조사를 받고 재판에 넘겨진 지 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교육부 통계상으론 '원인 미상'으로 기록돼 있다.
지난해뿐 아니라 최근 5년간 통계를 살펴봐도 '학교폭력·집단괴롭힘'으로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올해 6월만 해도 강원 양구군에서 사이버 폭력 및 집단 따돌림을 당한 고교 1학년이 숨졌고, 광주에선 동급생 11명에게 1년 6개월 동안 집단폭행을 당한 고교 3학년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 교육부 통계가 전혀 현실성이 없다는 점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 교수는 "학생들의 안타까운 희생을 막고 적절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선 교육부가 자살 원인을 명확히 파악하는 게 선행돼야 한다"며 "교육부의 방임이 학생들의 죽음으로 이어진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정부 기관들은 지난 2월 한국일보의 '혜린이의 비극' 보도(관련기사 ☞"혜린이처럼 고통 받는 학생 없도록" 사이버불링 대책 팔 걷은 정부) 이후 또래 청소년의 집단 괴롭힘과 사이버폭력을 예방하기 위해 뜻을 모았다. 교육부‧과학기술정보통신부‧법무부‧문화체육관광부‧여성가족부(여가부)‧방송통신위원회‧경찰청 등 7개 부처와 유관기관들은 지난 5월 '학생 사이버폭력 예방 및 대응 실무협의체'(실무협의체)를 발족해 학교폭력 대응 마련을 위해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기로 했다.
주관부처인 교육부는 사이버폭력이 학교폭력에 들어갈 수 있도록 법률 개정을 추진 중이다. 현행 ‘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에서는 사이버 따돌림만 학교폭력 유형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로 인해 학교현장에서는 사이버 따돌림을 제외한 여러 형태의 사이버폭력이 발생해도 학교폭력으로 분류되지 못하는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교육부는 사이버폭력을 학교폭력으로 정의하는 법률 개정을 통해 학교현장에서 사이버폭력에 적극 대응할 수 있도록 할 방침이다.
부처 간 유기적 협력을 통해 사이버폭력의 실태를 면밀히 파악할 수 있는 정책도 추진된다. 교육부는 사이버폭력의 정확한 실태 파악을 위해 내달 실시하는 학교폭력 실태조사 문항을 수정·보완할 예정이다. 그동안 교육부와 방송통신위원회에서 개별적으로 실태조사가 진행돼 혼선을 준다는 지적을 받았다. 특히 방송통신위원회에선 학생과 성인 모두를 대상으로 진행해, 교육부 조사와는 차이가 있었다. 교육부 관계자는 "한국교육개발원과 함께 학생들에 초점을 맞춘 문항을 새롭게 만들어 조사에 반영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사이버폭력의 심각성에 대한 경고가 잇따르자, 정부 기관들은 유기적 협력을 통한 대책 마련을 약속했지만 실질적으론 뒷걸음질 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표적으로 여성가족부가 약속했던 ‘온라인 상담’(사이버 아웃리치) 사업은 대폭 후퇴했다. 사이버 아웃리치란 상담자가 인터넷 카페와 블로그,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직접 방문해 혜린이처럼 학교에서 보호받지 못한 위기청소년을 발굴해 지원하는 사업이다. 여가부는 지난 2월 한국일보에 "상담원 확충을 통해 40%에 불과한 '청소년사이버 아웃리치' 상담 수용률을 높여 발길을 돌리는 학생이 없도록 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올해 1~7월까지 집계된 상담수용률은 32.3%로 지난해(39.9%)보다 오히려 7.6% 감소했다. 혜린이처럼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학생 3명 중 2명은 제대로 된 도움을 받지 못한 셈이다.
상담 수용률이 낮아진 것은 사이버상담 수요는 늘어나는 데 반해 상담원은 줄어든 영향도 있다. 권인숙 의원이 여가부에 제출받은 '사이버 상담·아웃리치 인력 상황'에 따르면, 현재 아웃리치 상담원은 12명으로 지난해(20명) 대비 40% 감소했다. 매년 사이버폭력을 호소하는 피해학생들이 늘어나는 추세에 역행한 셈이다. 여가부 관계자는 "아웃리치 사업과 관련해 기획재정부와의 협의 과정에서 예산이 깎이는 바람에 상담원 역시 불가피하게 줄일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했다.
2건 이상 학교폭력 가해학생이 2019년 3,028명에서 2020년 1,151명으로 62% 감소했지만, '반쪽짜리' 분석이란 지적이 제기됐다. 교육부는 지난해 '재발 가해학생'이 급감한 원인을 코로나19 확산으로 등교일수가 줄어들자 학생들 간 대면 접촉이 줄어든 영향으로 분석했다.
하지만 해당 조사가 온라인에서 판치는 사이버폭력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측면이 크다. 재발 가해학생 숫자만 집계했을 뿐 학교폭력 유형을 기준으로 정리된 자료는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혜린이가 겪었던 사이버폭력은 비대면 공간에서 반복적이고 집단적으로 발생했음에도, 오프라인 학교폭력 위주로 파악한 교육부 조사에선 집계되지 않았다. 교육부 관계자는 “올해 첫 시행한 사업이라 문제를 보완해 내년부터는 유형별로 구분해 대책 마련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올해 소년보호전담 보호관찰관은 217명으로 지난해(225명) 보다 8명 감소했다. 보호관찰제도는 소년들을 지도감독하면서 이들의 생활을 관리해 재범을 막는 안전장치다. 법무부 관계자는 “전자감독 보호관찰관에 우선적으로 인력을 편성해 소년 보호관찰관은 증원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경찰 내 학교폭력 전문수사관도 24명에 불과해 지난해와 똑같았다. 진화하는 학교폭력에 대응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규모다. 경찰청 관계자는 “최근 학교폭력 전문수사관 모집 공고를 냈다. 수사 경험이 있는 수사관들을 중심으로 규모를 확대할 예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