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한 탈레반… 언론인·서방 협력자에 ‘보복’ 본격화

입력
2021.08.20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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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 도이체벨레 현지인 기자 가족, 탈레반 공격에 사망
女 언론인 퇴출·방송사 대표 총살…언론 탄압 본격화
서방 협력자 색출·보복 우려도… 反탈레반 시위 격화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한 이슬람 무장조직 탈레반이 본격적으로 반대 세력 숙청에 나섰다. 수도 카불 입성 직후 “보복은 없을 것”이라던 약속은 역시나 거짓이었다. 비판적인 언론인을 처단하고, 서방국과 일한 협력자를 색출하고, 시위대를 향해 총을 난사했다. 탈레반의 압제를 피해 국외로 탈출하려는 행렬도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19일(현지시간) 독일 공영방송 도이체벨레(DW)는 아프간에서 탈레반이 자사 소속 기자의 집에 들이닥쳐 가족 1명을 총으로 죽이고 다른 1명에게 중상을 입혔다고 보도했다. 해당 기자는 이미 독일로 탈출한 상태였다. DW는 “탈레반이 언론인을 조직적으로 색출하고 있다”며 독일 정부에 강경 대응을 촉구했다. 아프간 민영방송 ‘가르가시TV’ 진행자 네마툴라 헤마트는 탈레반에 납치되고, 라디오방송 ‘팍티아 가그’의 대표 투판 오마르는 총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프간 언론 자유는 중대한 위기에 처했다. 탈레반은 특히 여성 언론인을 노골적으로 탄압하고 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국영방송 RTA 앵커 사하르 나사리는 이날 카불 시내에서 취재하던 도중 탈레반 대원들에게 카메라를 빼앗기고 폭행을 당했다. 앞서 같은 방송사의 간판 앵커인 샤브남 다우란도 “정권이 바뀌었으니 집에 가라”는 해고 통보를 받았다. 파즈와크 통신사 소속 여성 기자 18명에게는 탈레반이 여성의 직업 관련 규정을 정할 때까지 재택근무를 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고 한다. 국제언론단체 여성언론연대는 “탈레반 집권 이후 아프간 여성 언론인의 도움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고 밝혔다. 불과 이틀 전인 17일 탈레반 간부가 방송사 여성 앵커와 마주 앉아 인터뷰하며 달라진 모습을 보였던 건, 결국 쇼였던 셈이다.

탈레반은 미군이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와 일했던 아프간인 협력자 체포에도 혈안이 돼 있다. 영국 BBC방송은 유엔 기밀 보고서를 입수해 “탈레반 대원들이 체포 우선순위 명단을 갖고 집집마다 수색 중”이라며 “협력자들이 자수하지 않으면 대신 가족을 처형하겠다며 위협하고 있다”고 전했다. 카불 공항으로 향하는 도로와 공항 주변엔 검문소가 설치됐다. 탈레반이 총을 쏘고 구타했다는 증언도 잇따른다. 카불과 지방 대도시 몇 곳엔 오후 9시 이후 통행 금지령도 내려졌다.

하지만 탈레반에 맞선 불복종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아프간 독립기념일인 이날 수도 카불에선 시위대 200여 명이 아프간 국기를 들고 대통령궁 근처까지 행진했다. 동부 아사다바드와 잘랄라바드에서 열린 시위에선 탈레반의 발포로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했다. 북동부 판지시르주에는 저항군도 결집하고 있다. 판지시르는 1980년대 소련 침공과 1990년대 탈레반에 저항했던 아프간 구국 이슬람 통일전선, 속칭 ‘북부동맹’의 근거지다. 미 일간 뉴욕타임스는 “탈레반이 20년간 변화된 국가를 통치하는 건, 전국을 빠르게 장악했던 군사작전만큼이나 어려울 거란 사실이 증명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카불 공항은 탈레반을 피해 아프간을 떠나려는 인파로 아비규환이다. 소셜미디어에는 비통한 사연들도 올라왔다. 한 부모는 “아이만이라도 살려달라”면서 공항 담장 안쪽 미군에게 아이를 건넸다. 어른의 도움을 받아 담장을 기어오르는 소녀도 있었다. 영국군이 지키는 공항 근처 호텔을 찾아온 한 엄마는 품에 안고 있던 아기를 철조망 너머로 던졌다. 영국군 관계자는 “아기 몇 명은 철조망 위에 떨어졌다”며 “그후에 일어난 끔찍한 상황에 모든 부대원들이 눈물을 흘렸다”고 전했다.

김표향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