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레반이 돌아왔다. 20년 만이다. 아프간 정부는 깃발을 내렸고, 대통령은 이웃 나라로 망명했다. 미군 철수도 마무리되고 있다.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에 대한 영향과 뒤에 남는 아프간 사람들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일어나는 일을 대체로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미국의 아프간 출병은 2001년 9·11 테러의 산물이었다. 부시 행정부 네오콘들은 이것을 미국 본토 공격으로 단정했고, 국제체제 변환을 대책으로 제시했다. 모든 나라가 민주화해야 진정한 평화가 오며, 필요하면 예방전쟁도 가능하다고 했다. 독재와 전제는 무력을 써서라도 제거한다는 '체제 전환'(regime change)의 논리가 성립되었다. ‘테러와의 전쟁’은 ‘악(惡)과의 전쟁’이었다. 이란, 이라크와 함께, 북한도 ‘악의 축’의 하나로 지정되었다.
아프간은 체제 전환 논리를 실전에 적용한 최초 사례였다. 탈레반을 축출한 미국은 ‘살기 좋은 아프가니스탄’을 만든다는 ‘국가 건설’ 작업에 착수했다. 군대가 임무를 떠맡아 안보와 개발을 병행하는 지방재건팀(PRT)을 발족시켰다. 한국도 카불 북쪽 파르완에 한 개 팀을 설치·운영했다.
그러나 ‘국가 건설’은 성공하지 못했다. 지난달 바이든 대통령은 아프간 출병의 목표가 ‘국가 건설’이 아니었으며, 아프간 전쟁은 내전이라고 했다. 이달 초에는 ‘미국이 20년간 정부군을 양성했으니, 이제 스스로 싸워 나라를 지켜야 한다’고도 말했다.
아프간 철수는 미국이 철저하게 현지 상황과 국가 이익에 기초하여 내린 결정이다. 20년 전쟁을 치르면서 미국은 전사 2,500명, 부상 2만 명, 전비 2조3,000억 달러를 희생했다. 그사이 미국의 세계 GDP 비중은 구매력(PPP) 기준으로 21%에서 16%로 낮아졌고, 중국은 7.5%에서 18.3%로 높아졌다. 국제사회는 단극체제에서 1초다극으로, 다시 2초다극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바뀌었다. 10년 전 오바마 대통령이 ‘아시아 회귀’를 천명하고 아프간을 떠나려 했지만, 정치와 명분을 재다가 시기를 놓쳤다. 트럼프를 거쳐 바이든 대통령이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
냉전 후 미국 외교는 아프간 철수 이전과 이후로 구분할 수 있다. ‘테러와의 전쟁’이 한창이던 2006년, 미국 국제정치학자 저비스는 ‘패권의 정점에 선 미국이 현상 유지를 버리고 세계를 바꾸려 드는 것이 이상한 일’이라 했다. 아프간 철수로 미국의 세계 체제 전환 시도는 공식적으로 끝났다. 이제는 선택과 집중이다. 바이든의 최우선순위는 내치에 있고, 다음은 중국과 우위에서 경쟁하는 데 있다. 아프간을 떠난 미국은 동아시아에 더 많은 역량을 기울일 것이다.
미국이 중국에 집중하면 미·중 갈등이 격화될 수 있다. 그러나 예단할 필요는 없다. 바이든 행정부가 민주주의를 중시하지만, 선과 악의 문제로 보지는 않는다. 이념보다 현실을 따르는 미국이 미·중관계를 제로섬으로 몰고 갈 이유는 없다. 경쟁도 군사보다 경제기술 분야에서 일어난다. 기후변화 등 지구적 의제가 압도하는 터라, 양국은 공존의 방식을 찾아낼 것이다.
미국이 강대국 관계를 중시하면서 북한에 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줄어들 수 있다. 그러나 미국 외교가 이념을 벗어나는 것은 한반도 상황 변화에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과거 사례를 보면, 미국 행정부가 이념보다 현실을 추구할 때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가 가능했다. 대담한 구상이 나올 가능성도 배제할 이유가 없다.
아프간 철수로 국제정치사의 한 장이 또 넘어간다. 경쟁과 협력의 무대가 바뀌고 세력 균형의 모습도 바뀐다. 그에 따라 우리 게임의 난도(難度)가 올라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