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억 번 K팝 '슈퍼 회사원' 시샘하지 않는 이유

입력
2021.08.21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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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억 수령 'BTS  프로듀서' 피독, 상반기 연봉왕
MZ세대 "성과 비하면 열정페이 수준, 높은 금액 아냐"
"명예보다 연봉 보상이 공정" 대리만족

올 상반기 '연봉왕'은 대기업이나 정보기술(IT)이 아닌 K팝 업계에서 나왔다. 이수만(SM) 양현석(YG) 박진영(JYP)이 아니다. 반전의 주인공은 그룹 방탄소년단(BTS) 소속사 하이브의 수석 프로듀서인 피독(본명 강효원·38). 급여(3,800만 원)보다 상여금(1억1,100만 원)이 3배에 가깝지만 이 정도면 평범한 수준이다. 그를 연봉왕으로 끌어올린 건 무려 399억2,800만 원에 달하는 주식매수선택권(스톡옵션) 행사 금액. 그래서 총 연봉이 400억7,700만 원에 달한다. 두둑한 퇴직금을 챙긴 현대차그룹 정몽구 명예회장(302억 원)을 멀찌감치 따돌렸다. 이렇게 재벌 그룹 오너보다 많이 받는 '슈퍼 회사원'의 등장은 불과 몇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능력주의 기조가 널리 퍼진 콘텐츠 업계의 조직 문화가 주목받고 있다. '공정한 보상체계'를 갈구하는 MZ세대(1980~2000년대 초반 출생)는 "피독이 올린 성과를 생각하면 400억 원은 '열정페이' 수준"이라는 반응을 보일 정도다. 그의 연봉왕 등극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라는 얘기다.



콘텐츠 회사의 슈퍼 회사원들

20일 상장사들이 최근 공개한 반기 보고서를 보면, 콘텐츠 기업에서 '슈퍼 회사원'들이 잇따라 등장한 점이 도드라진다. 나영석 CJ ENM PD(10억8,100만 원)가 소속 그룹 회장보다 연봉을 많이 받은 건 이제 뉴스도 아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즌2를 제작 중인 신원호 PD도 7억7,700만 원을 받아 그룹 내 보수 상위 4위에 올랐다. 콘텐츠의 시대가 왔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취업 준비생과 직장인들은 콘텐츠 기업 문화에 주목한다. 연봉 수준은 삼성·SK·LG·현대차 등 전통의 대기업보다 상대적으로 낮지만, 성과에 따라 스톡옵션이나 상여금을 듬뿍 챙겨 주는 능력 우선 문화에 대한 열망이 관심의 배경이다. 직급과 근속 연차가 아닌 능력에 따른 보상을 의미하는 MZ세대가 바라는 '공정'이 이들이 추구하는 새 기업 윤리로 떠오른 까닭이다.



"자산가치 폭증 반작용" MZ세대의 열광 이유

MZ세대는 이들을 시샘하지 않는다. CJ ENM에 다니는 이모(32)씨는 "나영석이나 신원호 같은 PD들이 실질적인 성과를 내 다른 직원 연봉을 주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며 "이런 보고서가 나올 때면 '블라인드(직장인 익명 커뮤니티)'에 '나영석이나 신원호는 더 받아도 된다'는 글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여준상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부동산 등 자산가치가 폭증하는 시대에 회사에서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만 받아선 미래를 설계할 수 없다는 허무함이 슈퍼 회사원에 MZ세대가 주목하는 이유"라며 "그래서 기본급보다 성과급에 관심이 많고, 제대로 된 대우에 더 민감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단발성 수익이지만 기존에 받은 스톡옵션은 이직 때 능력의 잣대로 작용할 수 있다.

특히 MZ세대가 주로 이용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의 피독 보수 관련 게시물엔 '열정페이'라고 표현한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피독이 방탄소년단의 성공에 음악적으로 이바지한 성과를 고려하면 400억 원을 열정페이라고 부를 만큼 더 받아야 한다는 얘기다. 여기엔 대리만족의 심리도 깔렸다.


이수만·양현석·박진영에서 세대교체

피독은 '상남자' '아이 니드 유' '피 땀 눈물' '봄날' 'DNA' '페이크 러브' '작은 것들을 위한 시' 등을 작곡했다. 방탄소년단이 세계적 스타로 한 단계씩 성장할 때마다 피독은 그 음악적 성장의 발판이 됐다. 전설의 록그룹 비틀스도 프로듀서 필 스펙터를 만난 뒤 명반으로 손꼽히는 '렛 잇 비'를 냈다. 음악에서 프로듀서는 가수가 재능을 더 발휘할 수 있는 곡을 기획하고, 흐름을 읽어 대중의 눈과 귀를 더욱 사로잡게 하는 역할을 한다. 성상민 문화평론가는 "한국에선 1990년대 이후 김창환, 이수만, 박진영 등이 기획사 사장을 겸하며 프로듀서의 역할을 했다"며 "K팝의 부상으로 프로듀서의 중요성이 더 커졌고, 피독의 부각은 그 존재감이 확연히 드러나는 계기이자 세대교체의 신호탄"이라고 분석했다.



직급 낮고 현장형... 슈퍼 회사원의 특징

21세기 슈퍼 회사원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다. ①연차보다 직급은 낮고 ②현장형이다. 하이브와 CJ ENM에 따르면 피독과 나영석, 신원호는 모두 임원이 아닌 직원이다. 2001년 KBS 입사 동기인 나영석과 신원호는 일반 기업이라면 관리직에 올라 조직 관리에 주력할 연차(20년)다. 하지만 두 사람은 현장을 뛰며 직접 프로그램을 만든다. 연공서열에 맞춰 일괄적으로 일정 연차가 되면 관리직에 앉혀두는 대신 직원 장점에 맞게 직무를 주고 장기적으로 지원하는 인사 체계 덕에 가능했다. 이명한 티빙 공동대표는 "PD 직종 특성상 맡은 콘텐츠나 IP(지적재산)관리에 대해 확실하게 책임지는 게 결국 회사에도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일반 기업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인재 활용 방식이다. 하이브 관계자도 "하이브 전신인 빅히트뮤직부터 10여 년 동안 함께한 피독 프로듀서도 A&R(아티스트 앤드 레퍼토리·아티스트 육성 및 곡 수집)팀을 맡아 관리하는 대신 홀로 창작에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무엇이 사람을 창의적으로?" 기업 문화 바뀌어야

슈퍼 회사원의 잇따른 등장을 계기로 기업 문화 변화에 대한 갈증도 커지고 있다.

김헌식 카이스트 미래세대행복위원회 위원은 "K팝 등 국내 콘텐츠 산업이 요즘 앞으로 나아가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무엇이 사람을 창의적으로 만드는가'란 고민에서 출발한 개방적 조직 문화"라고 말한다. "기성세대에겐 관리직을 거부하는 젊은 세대가 이기적으로 비칠 수 있겠지만, 남의 일이 아닌 내 일을 통해 낸 성과에 따른 수익 보장이 중요한 MZ세대의 조직 이탈을 막기 위해선 기업들이 고민해야 할 숙제"라는 것이다.


양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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