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근본주의 무장조직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 장악은 유럽 정치권마저 뒤흔들고 있다. 탈레반의 공포 통치를 피해 고국을 떠난 난민들이 유럽 땅을 속속 밟으면서, 6년 전 ‘반(反)난민’을 기치로 급부상했던 극우 포퓰리즘(대중 인기영합주의) 불씨가 되살아날 우려 역시 높아지는 탓이다.
18일(현지시간)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아프간 난민들이 속속 유럽에 도착하면서 각국 정치권이 술렁이고 있다. 독일에서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소속된 중도 우파 성향 기독민주당(CDUㆍ기민당)이 “2015년 반복은 안 된다”는 입장을 연이어 내놓고 있다. 독일 정부가 난민 수용을 검토하는 가운데, 신중을 기할 것을 당부한 셈이다. 당의 총리 후보이자 유력한 차기 주자인 아르민 라셰트 CDU 대표 역시 트위터에 “다시는 시리아 내전 당시의 실수를 하면 안 된다”며 힘을 보탰다.
이는 주(州)정부 움직임과 대비된다. 독일 16개 주는 이미 아프간 난민 수용 채비에 나섰다. 북부 함부르크주는 난민 200명을 위한 임시 쉼터를 마련했다. 최대 주인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1,800명)을 비롯해, 바덴뷔르템베르크(1,100명), 니더작센(400명)주 등도 수용 계획을 밝혔다. 그와 달리 집권당이 이에 반기를 들며 부정적 입장을 피력하는 셈이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이날 “아프간 붕괴 결과를 유럽 혼자 감당할 수는 없다”며 난민 위기 공동 대응 필요성을 강조했다. 오스트리아, 그리스 등 중동 난민이 유럽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나라들 역시 “관문이 되지 않겠다”며 빗장을 건 상태다.
이들의 반대는 6년 전의 난민 사태 악몽이 생생하기 때문이다. 2015년 시리아 내전 격화로 수많은 난민이 유럽에 몰려들었을 때, 유럽 각국은 인도주의 차원에서 이들에게 국경을 개방했다. 메르켈 총리도 당시 “우리는 감당할 수 있다”며 100만 명 이상을 받아들였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이후 유럽 각국에선 “난민이 일자리를 빼앗아간다”는 불만이 커졌다. 세계 금융위기로 경제가 악화한 상황에서 화살을 난민에게 돌렸단 얘기다.
수십 년간 유럽 정치의 ‘아웃사이더’였던 극우 포퓰리스트 정당은 이 같은 난민 반대 분위기에 편승, 주류였던 중도파를 위협하며 급속히 세력을 확장했다. 2016년에는 반인종ㆍ보호주의를 들고 나온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포퓰리즘 바람은 한층 거세졌다. 이후 이탈리아, 헝가리 등에선 극우 정부가 들어섰고, 독일과 프랑스에서도 극우정당 ‘독일을위한대안(AfD)’과 ‘국민연합(RN)’이 각각 처음으로 연방 의회에 입성했다. 독일 공영방송 도이체벨레는 “AfD는 2015년 반이민정서를 타고 전국적인 정치세력을 만들었고, 2017년 하원 내 최대 야당이 됐다”고 설명했다.
그나마 지난해 트럼프 대통령의 대선 패배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라는 보건위기로 민심이 흔들리면서 이들의 인기는 사그라든 상태다. 그러나 이번 아프간 난민 위기가 유럽 내 극우 세력 재기의 발판이 될 수 있다는 게 정치권의 시각이다. 유럽 정치지형의 격변이 예고될 수 있단 의미다.
실제 아프간 난민의 유럽 진입 소식이 알려지자 각국 극우 정당은 목소리를 높였다. 독일 AfD와 프랑스 RN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난민을 받아선 안 된다”며 거세게 항의하고, 이탈리아 극우정당 ‘동맹’의 마테오 살비니 대표는 “잠재적 테러범들을 포함해 수천 명의 남성에게 문을 여는 것은 절대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당장 총선이 다음 달로 다가온 독일과 내년 대선을 앞둔 프랑스 집권당에겐 악재다. 특히 재선을 노리는 마크롱 대통령 입장에선 경쟁자인 마리 르펜 RN 대표의 약진이 부담이다. NYT는 “아프간 난민 물결은 마리 르펜 RN 대표의 명운을 되살릴 수 있다”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