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100% 일본인이자 100% 흑인 " 오사카 나오미의 용기에 대하여 

입력
2021.08.21 10:00
19면
<50> 넷플릭스 '오사카 나오미: 정상에 서서'

편집자주

극장 대신 집에서 즐길 수 있는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OTT) 작품을 김봉석 문화평론가와 윤이나 칼럼니스트가 번갈아가며 소개합니다.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에 연재됩니다.


현재의 이야기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사람들을 보면 '용기'라는 단어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으므로 결말을 알지 못하는 이야기를 담기 위해서 카메라를 드는 마음을 알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용기가 필요한 일인 것만은 확실하다는 믿음 때문이다. 오사카 나오미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기록하기로 했을 때도 비슷했을 것이다. 이 신예가 세레나 윌리엄스라는 세계 정상의 테니스 선수를 결승전에서 꺾으며 US오픈 테니스 대회 여자 부문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순간, 특별한 배경을 가진 젊고 재능 있는 선수의 이야기를 담아보고 싶다는 욕망이 피어올랐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오사카 나오미의 테니스 선수로서의 여정이 어떤 길을 향해 갈지는 모르는 채로 카메라를 들었을 것이다. 그 순간부터 너무 일찍 세계 정상의 자리에 오른 한 여성의 인생이 마구 튀어 오르기 시작한다. 마치 테니스공이 어디로 올지, 또 어디로 튈지 예상은 할 수 있어도 정확히 맞힐 수는 없는 것처럼. 안다고 해서 받아칠 수 없다는 점에서, 운명처럼.

'오사카 나오미: 정상에 서서'는 테니스 역사상 최초로 테니스 그랜드슬램 4회 우승(US 오픈 2회, 호주 오픈 2회)을 달성한 최초의 아시안이자 지난 2020 도쿄올림픽 개회식의 성화 점화 주자였던 오사카 나오미의 이야기를 담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다. 테니스 역사에 남을 새로운 스타 탄생의 순간으로 기록될 2018년 US오픈 우승으로부터 이후 2년의 세월 동안 오사카 나오미가 테니스 코트 안과 밖에서 경험하는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가 일어날 시기가 막 펼쳐질 시점에, 오사카는 이렇게 입을 뗀다. "테니스는 혼자 하는 스포츠예요." 코트에 홀로 서서 외로운 싸움을 혼자 감내해야 하는 일에 익숙한 사람의 건조한 목소리다.


다큐멘터리의 시선 역시 말수가 적고 속내를 잘 드러내려 하지 않는 오사카를 닮았다. 스포츠 선수의 현재를 담아낼 때 끓어오르는 재료가 되는 열정이나 간절함, 노력은 주재료로 사용되지 않는다. 카메라는 최고가 된 다음, 꿈이 이루어진 후, 간절했던 바람을 자신의 실력으로 쟁취해낸 이후에도 이어지는 오사카 나오미의 싸움에 집중한다. 언제나 '따라가는 사람'이었고 '따라잡는 사람'이었던 오사카는 맨 앞에 서 있고 절대 져서는 안 되는 상황에 처하자 엄청난 긴장과 중압감에 시달린다. 2020년 최고 수입을 기록한 여성 운동 선수이자, 한 시대의 스포츠 아이콘이 된 선수가 스스로 묻는다. "잘하는 테니스 선수라는 걸 빼면 저에게 뭐가 남을까요?"

여기서부터 이 다큐멘터리가 가는 길은 다른 스포츠 인물 다큐멘터리와 달라진다. 이른 나이에 세계 최고가 된 여성에게 쏟아지는 세계의 관심과 호기심 속에서 오사카 나오미라는 개인이 어떻게 흔들리고 또 어려움을 겪는지를 담담하게 담아내는 방향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오사카의 첫 US오픈 우승을 지켜본 뒤 개인적인 조언과 대화를 나누는 관계로 지냈던 위대한 농구 선수 코비 브라이언트가 헬기 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 오사카는 큰 충격에 휩싸인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알지 못하는 도시를 정처 없이 걷는 것뿐이다.


승리의 순간에도 포효하지 않고, 실패의 순간에도 쓰러져 울지 않는 오사카가 코트 위에서 복잡한 감정을 드러내는 유일한 순간은 15세의 떠오르는 스타 플레이어 코코 가우프와의 경기에서 승리했을 때다. 그는 울고 있는 가우프에게 다가가 현장 인터뷰를 함께하자고 제안한다. "사람들에게 네 기분이 어떤지 전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코트를 떠나는 것이 좋을지를 고민해온 오사카였기에 할 수 있는 제안이다. 오직 이기기 위해서 상상 이상의 시간과 노력을 쏟으며 삶의 많은 부분을 희생해 온 그가, 같은 경험을 하며 성장 중인 더 젊은 여성 선수에게 자신의 시간과 마음을 내어준다. 이게 바로 승리자의 품격이고, 스포츠 정신이다. 패배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도움을 요청하지 않으며 홀로 견뎌내던 오사카는, 반대의 상황일 때 상대의 마음과 기분이 더 나아질 마음을 찾아내는 품격을 가진 적이다.


40분 정도의 분량 세 편으로 이루어진 이 다큐멘터리 시리즈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사건은 2편인 '챔피언의 정신력' 편 중반부에 등장한다. 2020 도쿄올림픽을 준비하며 미국 국적을 포기하고 일본 국적을 선택한 것이다. 흑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했다고 비난하는 말이 쏟아진다. 이 문제는 3편 '나의 길을 찾아서'에도 이어진다.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미국 시민 조지 플로이드가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미국 전역에서 흑인 인권운동이 터져 나온다. 오사카는 남자친구와 함께 직접 미네소타의 시위 현장에 방문한 뒤, 참가 중이던 테니스 대회에 하루 불참할 것을 선언한다. 흑인 인권운동에 대한 스포츠계의 지지가 잇따르던 상황이었지만 대부분 팀 스포츠였던 상황에서, 홀로 선택의 몫을 감당해야 하는 테니스계에서는 오사카가 처음이었다. 이 상황 직전에 그는 자신의 이미지에 대해 이렇게 표현한다. "묵묵하고 선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요." 하지만 오사카는 거기 머무르기를 거부한다. 테니스가 혼자 하는 스포츠라면, 혼자라도 목소리를 내기로 한 것이다.


역사는 반복되고, 개인에게도 그러하기에 2018년 US오픈의 우승은 2020년 US오픈의 우승으로 이어진다. 많은 사람이 기억하겠지만 팬데믹 상황 속에서 진행된 이 대회에서 오사카 나오미는 조지 플로이드를 비롯해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사망한 흑인들의 이름이 적힌 마스크를 쓰고 등장해서 이목을 끌었다. 결승전까지 간다면 총 7경기를 할 수 있다. 7개의 마스크와 그 안에 적힌 이름을 모두 보여주고 싶다던 그는 목표를 이룬다. 반복된 우승이지만 첫 우승에 트로피만 있었다면, 두 번째 우승에는 오사카의 메시지가 있다. 아시안이며 흑인이고 일본인 여성인 오사카 나오미는 이 모든 정체성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해야 하고 하고 싶은 말을 한다. 그는 100%의 일본인이자 100%의 흑인으로서, 곧 자기 자신인 채로 자신이 생각하는 옳은 편에 선다. 같은 대회, 두 번의 우승 사이 달라진 점이다. 역사는 반복될 수 있지만, 그 역사를 써나가는 개인은 변하고 성장할 수 있다. 외로움과 고통과 불안, 혼란 속에서도 나의 길을 찾고 또 선택할 수 있다.

그렇기에 더더욱 다큐멘터리가 끝난 시점 이후, 지금도 현재형으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올해 오사카 나오미는 프랑스오픈 단식 1회전 경기 후 기자회견에 참여하지 않았다. 기자회견이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분명히 밝혔다. 첫 US오픈 우승 이후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는 사실 역시 공개했다. 결국 '오사카 나오미: 정상에 서서'는 그가 우울증과 싸우던 시기를 담아내게 된 셈이다.


이후 두문불출하던 그는 지난여름 개최된 도쿄올림픽의 성화 점화 주자로 등장한다. 그를 일본의 새 얼굴로 내세울 정도로 기대 속에서 치른 대회였지만, 오사카는 메달권에 가까이 가지 못하고 3라운드에서 탈락하고 만다. 이후 지금까지도 그에 대한 일본 여론은 매우 좋지 않다고 한다. 그가 미국 국적을 포기했을 때 "너의 흑인 카드는 취소된 거야"라고 말했던 사람들처럼, 인생의 대부분을 미국에 살았고 일본어가 유창하지 않다는 이유로 '일본인 카드' 역시 취소된 듯이 일부 일본인들이 혐오를 드러내고 있다. 최근에는 기자회견 거부 후 처음으로 가진 공식 기자회견에서 미디어와 스포츠 스타의 관계에 대해 집요한 질문 공세에 시달리면서 또다시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전 세계에 공개되기도 했다.

지난해 US오픈 중 보여준 마스크 퍼포먼스의 의미를 묻자, 오사카는 "사람들이 이야기하게 만드는 것이 저의 목표예요"라고 답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할 시간이 아닐까. 이름과 얼굴이 알려진 사람이라는 이유로 끊임없는 관심과 소문, 악플에 시달려야 하는 사람들의 정신 건강을 왜 보호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그럼에도 자신이 가진 힘을 계속 옳은 방향으로 사용해보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이 조금씩 바꿔가고 있는 세상에 대해서 말이다. 결말이 없는 인생을 계속 살아가는 동안, 자신의 약점과 상처를 솔직히 드러내면서도 인간으로서 직업인으로서의 품격을 지키기 위해 싸우기를 멈추지 않는 것 역시 용기일 것이다. 나라면 이 다큐멘터리의 부제를 '용기에 대하여'라고 달았을 것 같다.

윤이나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