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레반 물러난 20년, 아프간 여성들이 이룬 '더디지만 큰 변화'

입력
2021.08.21 17:00
2001년 미군 침공으로 탈레반 물러나자
직후 최초의 여성 부총리·대선후보 나와
탈레반 잔당의 살해 위협·가부장제 속
억울한 죽음엔 거리에서 저항하는 변화
탈레반 재집권에 피켓 시위하는 여성들도

다시 탈레반이 왔고 아프가니스탄 여성 인권은 후퇴 위기에 놓였다. 탈레반은 집권 당시(1996~2001년) 여성의 전신을 가리는 '부르카' 착용을 강제했고, 이동의 자유를 빼앗았으며 만 8세 이상 여성의 교육을 금지했다. 탈레반 조직원들과의 강제 결혼이라는 인권 유린도 서슴지 않았다.

탈레반은 17일(현지시간) 첫 기자회견에서 여성 인권을 존중하겠다고 선언했지만, 그날 북부 타하르주에선 한 여성이 부르카를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탈레반 조직원의 총에 맞아 숨졌다. 이는 20년 동안 여성들이 힘겨운 노력으로 일궈낸 변화가 스러짐을 알리는 신호탄일지도 모른다는 어두운 전망이 나온다.


탈레반 물러나자...최초의 여성부총리·대선후보 나와

누구에게나 타인의 삶을 파괴할 권리는 없고 세상에 마땅한 전쟁은 없다. 다만 미국의 침공은 결과적으로 2001년 말 탈레반을 물러나게 했고, 여성의 삶을 복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아프간 여성들이 다시 학교로 돌아간 것은 이듬해인 2002년이었다. 1996년 탈레반 집권 이후 6년 만의 등교였다. 거듭된 내전으로 교육 시스템이 마비된 데 더해 탈레반은 여성의 배움을 차단했다. 남성에게도 이슬람 교리만을 가르쳤다. 그해 아프간 성인 남녀의 문맹률은 각각 70%, 90%였다.


히잡을 쓴 여성 방송 진행자는 여성 '복권'의 상징과도 같았다. 과도 정부 내각에선 최초의 여성 부총리가 탄생했다. 강제 퇴역당했던 카톨 무하마드자이는 원대복귀와 함께 준장으로 진급했다. 그렇게 첫 여성 공군 장성이 됐다.

탈레반 이후 첫 대선(2004년)에선 최초의 여성 후보가 등장했다. 문제는 다수 여성들의 참정권 행사였다. 탈레반 잔당들이 "투표소에 가는 여성을 우선 살해하겠다"고 경고했기 때문이다. 아프간에선 '여성이 집 밖에서 죽는 것은 가족의 수치이자 모욕'으로 생각했던 탓에 여성들은 섣불리 투표에 참여할 수 없었다고 한다.


탈레반 잔당·가부장제...'여권 신장' 지연시킨 장애물들

탈레반의 위협은 이후에도 지속됐다. 아프간 여성 인권 회복을 막는 제1의 장애물이었다. 2008년 고위 여성 경찰관이 탈레반의 총격을 받아 사망했고, 이듬해엔 여성 배우의 배우자가 피살됐다. 탈레반은 비슷한 시기 여학생과 교사 11명의 얼굴에 염산 테러를 했고, 다른 여학교에도 테러 공격을 하겠다고 공개 협박했다. 2009년 대선에선 손가락이 잘린 여성 유권자도 있었다.

여성 인권을 지연시킨 것은 탈레반뿐만이 아니었다. 뿌리 깊은 가부장제도 큰 걸림돌이었다. 2014년 형법 개정안이 한 예다. 의회는 그해 가정폭력 사건에서 친척들의 증언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여성을 상대로 한 폭력 대부분은 가정 내에서 이뤄졌고, 이를 밝히는 결정적 증거는 친척들의 증언이었는데도 말이다.

다행히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은 형법 개정안의 수정을 명령했다. 당시 국제사회의 비판을 의식한 결정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그 뒤엔 아프간 인권단체들의 전방위 로비도 존재했다.



[참고] 타임지 '코 없는 여인' 표지 논란
2010년 미국 주간 '타임'지의 표지에 코가 잘린 아프가니스탄 여성 비비 아이샤(18)의 사진이 실렸다. 아이샤는 남편과 시댁의 학대에 못 이겨 달아나다가 탈레반 규율에 따라 코 일부와 두 귀를 잘렸다고 한다. 그런데 타임지가 사진에 '미군이 철수했을 때 아프간에서 벌어질 일'이라고 제목을 달면서, 미군의 주둔을 강요하는 '감정 협박'이라는 비난이 제기됐다. 이는 '미군 주둔이 정말 아프간 여성 해방에 결정적인 요소였는지'에 관한 논쟁으로 이어졌다.

파르쿤다의 억울한 죽음에 거리로 나선 여성들

이듬해인 2015년 인권을 부르짖는 여성의 목소리들이 폭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파르쿤다라는 여성이 '코란을 불태웠다'는 누명을 쓰고 수백 명에게 몰매를 맞아 숨졌다. 경찰 13명이 폭행을 방관한 것으로 조사돼 혐오 살인이라는 공감대가 더욱 형성됐다.

탈레반이 물러난 지 14년이 지난 시기였지만 아프간 여성들은 배우자의 동의가 있어야 공부와 취업이 가능했고, 혼자서는 병원에도 갈 수 없었다.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성적 자기결정권도 여전히 존중받지 못했다.

여성 인권운동가들은 파르쿤다의 시신을 직접 운구하며 아프간 사회에 몸소 저항했다. 이슬람권에서는 여성이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 당시 시위는 파격적으로 인식됐다고 한다. 소수였지만 남성들이 동참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컸다.


여성들과 인권단체의 노력에 더뎠지만 변화는 있었다. 2014년 대선에서 여성 유권자의 투표율이 36%를 달성했고, 2017년엔 아프간 10대 여성들이 미국에서 열리는 국제 로봇 경진대회에 참가했다는 소식도 들렸다. 지난해엔 2000년대 초까지 탈레반의 심장부였던 남부 칸다하르에 여성이 이용할 수 있는 헬스장이 문을 열었다.

탈레반도 외관상의 변화는 보였다. 2012년 탈레반의 고위 성직자가 "여자아이도 남자아이처럼 배울 권리가 있다"며 탈레반 거점 로가르주에서 여자아이들을 직접 가르친다는 보도가 나왔다. 2019년엔 "미국과의 평화 협상에 복수의 여성이 탈레반 대표단 일원으로 참석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는 아프간 여성들

그러나 탈레반의 재집권과 동시에 여성이 살해되면서 겉모습만 바뀌었다는 것이 기정사실화된 분위기다. 탈레반은 지난달 칸다하르에서 9명의 여성 은행원을 강제 퇴사시킨 데 이어, 최근 아프간 국영TV 여성 직원들도 무기한 정직 처분을 받았다.

아프간 여성들은 서서히 쟁취해 온 삶을 쉽게 빼앗기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다. 아랍권 매체 알자지라의 하미드 모하마드 샤 통신원은 17일 무장한 남성들 사이에서 4명의 여성이 탈레반 집권에 항의하는 영상을 올렸다.

여성인 랑기나 하미디 교육부 장관, 자리파 가파리 메이단 샨 시장도 모두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면서도 해외 언론에 현지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죽음의 공포와도 맞서는 용기는 20년 세월이 만들어 낸 가장 큰 변화일 것이다.

윤주영 기자
박서영 데이터분석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