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 정권의 갑작스러운 붕괴와 미국의 굴욕적인 패퇴를 두고 미 행정부 안에서 책임 공방이 가열되고 있다. 이슬람 무장조직 탈레반의 재집권이 임박했다는 정보기관 보고를 조 바이든 대통령이 묵살했다는 증언이 잇따른다. 국방부와 국무부 등 부처 간 불협화음도 ‘아프간 대혼란’을 초래한 원인으로 거론된다. 의회까지 고강도 조사를 예고하면서 바이든 행정부는 출범 이후 최대 위기를 맞았다.
17일(현지시간) 미 일간 뉴욕타임스는 전ㆍ현직 정부 관리들을 인용해 “정보당국이 7월부터 아프간 정부가 수도 카불에서 버티기 힘들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을 수 차례 보고했음에도 행정부가 아무런 대처를 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한 정보 보고서에는 “탈레반이 주요 도시를 점령하면 순식간에 연쇄 붕괴할 것”이라는 경고가 담겼다. 또 다른 보고서는 “탈레반이 1990년대에 권력을 차지했던 경험을 토대로, 지방 거점 도시를 장악하고 북부 지역을 점령한 뒤 카불에 입성하는 수순을 밟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보고서 내용은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중앙정보국(CIA)도 7월 보고서에서 “아프간군이 카불로 향하는 주요 도로의 통제권을 상실했고, 중앙 정부의 생존 가능성이 심각한 위험에 처했다”고 평가했다. 국무부 내 정보부서 또한 “아프간군의 전투능력 상실과 안보 상황 악화가 정부 붕괴를 초래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관계자들 사이에선 “현재 아프간 상황은 CIA가 가정한 최악의 시나리오와 매우 유사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말까지 흘러나오고 있다.
그러나 백악관은 정보당국의 경고를 무시하고 8월 31일 철군 완료 목표를 밀어붙인 것으로 보인다. 바이든 대통령은 7월 8일 기자회견에서 “아프간 정부는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낙관했다. 백악관이 완전 철군 계획을 발표했던 4월만 해도 정보기관들은 아프간 정부가 18개월 정도 버틸 거라 봤지만, 탈레반은 이달 초 주요 도시를 장악한 지 열흘 만에 카불에 입성했고, 미국은 쫓기듯 치욕스럽게 아프간을 빠져나와야 했다.
책임 소재를 놓고 정부 부처 간 갈등도 깊어지고 있다. NBC뉴스는 애초부터 철군 계획에 우려를 표했던 국방부 내에선 백악관 외교안보팀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고위 당국자에 따르면 국방부는 철군 반대 의견이 묵살당한 뒤 군의 안전을 위해선 빠른 철수가 중요하다고 판단해 철군 완료 시점을 7월 4일로 잡았다. 그런데 아프간 정세가 불안정해지자 백악관이 8월 31일까지 군대 주둔을 명령했다고 한다. 20년간 미군을 도운 아프간 내 협력자들을 순차적으로 미국으로 출국시키려던 계획에도 차질이 빚어졌다.
반대로 CIA에선 7월 바그람 공군기지 기습 철수를 비롯해 군의 빠른 철수 속도에 당황했다는 뒷얘기가 들린다. 또 협력자들의 미국 체류를 위한 비자 발급 같은 기초 단계에서 국무부의 협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볼멘소리도 나오고 있다. 정부 부처 간 서로 다른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백악관이 무리한 철군 일정을 고집한 탓에 총체적인 혼란상을 야기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배경이다.
결국 의회는 아프간 사태와 관련해 청문회를 예고하고 나섰다. 밥 메넨데스(민주당) 상원 외교위원장은 “바이든 행정부가 미국의 성급한 철군에 대한 의미를 정확히 평가하지 않다는 점에 실망했다”며 “지난 몇 년간 정책ㆍ정보 실패가 초래한 끔찍한 결과에 대해 완벽한 설명을 요구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