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숫가루 싸들고 간 '남미 여행 77일' 서먹한 모녀, 절친이 되다

입력
2021.08.20 09:00
10면
[인터뷰-엄마] <7> ‘여행 모녀’ 이명희·조헌주
어색한 사이였던 모녀가 떠난 남미 여행
‘엄마한테 이런 모습이?’ ‘내 딸이 이랬나’
사건 사고 겪으며 추억도, 친밀감도 쌓여

자녀라면 한 번쯤 꾸는 꿈, 바로 엄마와 떠나는 여행입니다. 그 로망을 실현한 모녀가 있습니다. 이명희(67)ㆍ조헌주(40)씨입니다. 두 사람은 4년 전인 2017년 6월부터 8월까지 남미 8개국을 여행했습니다. 77일간의 배낭여행이었죠. 딸 조헌주씨는 “원래 엄마와 서먹한 사이였다”고 했습니다. 엄마에게 먼저 전화 거는 일도 거의 없었고, 통화를 해도 “네” 소리만 반복하다 끊기 십상이었죠. 그런데 이 딸은 왜 엄마와 지구 반대편의 남미로 여행을 가기로 했을까요. 그리고 여행 뒤, 이 모녀에겐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요. 두 사람을 만나 얘기를 들어봤습니다. 인터뷰는 두 사람의 대화 형식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엄마, 엄마! 사진 그만 찍고 앉아보세요. 자기소개 하셔야죠.”

“전망이 좋아서 말이야. 저기가 숭례문 맞니? 남산타워도 보이네. 내 소개? 음, 저는 4년 전 나이 예순세 살에 딸과 남미를 여행하고 온 이명희입니다. 제가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형편이 어려워져서 학교를 길게 다니진 못했지만, 쉰 살이 넘어서 신학을 공부했고 또 수필 작가로 등단도 했답니다.”

“제 소개도 할게요. 저는 엄마의 3녀 1남 중 셋째인 조헌주예요. 20대엔 대학에서 극작을 전공해 방송작가로 일했어요. 뒤늦게 뮤지컬을 배우기도 했고, 영어 학원을 운영한 경험도 있답니다. 지금은 글쓰기 강의를 해요. 여행을 무척 좋아해서 그간 다닌 여행지가 30개국이 넘어요. 가장 힘들었던 곳은 엄마와 다녀온 남미였죠! 그런데 우리 엄마, 오늘 엄청 꾸미고 오셨네요. 엄마! 오늘따라 머리 모양이 예뻐요. 평소와 다른 거 같은데, 미용실이라도 다녀오신 거예요? 그러고 보니 화사하게 화장도 하시고 원피스도 입으셨어요.”

“충북 증평 사람이 서울에 그것도 인터뷰를 하러 오는데 어떻게 그냥 오겠어. 신경 좀 썼지. 미용실 하는 엄마 친구 있잖아. 걔가 해준다고 오라고 하더라고.”

“아, 그랬구나. 그런데 엄마가 서울 가는 건 어떻게 알고 머리를 해주신 거예요?”

“엄마가 자랑 좀 했지. 우리가 여행 다녀와서 쓴 책(‘서먹한 엄마와 거친 남미로 떠났다’)도 줬지. 인터뷰도 하게 됐다고 하니까 곱게 드라이하고 가야 한다는 거야.”

“그렇게 좋으세요?”

“그럼. 내가 딸 셋, 아들 하나 자식들 중에 너한테만 ‘이쁜(예쁜) 딸’이라고 하는 거 알아? 내 폰에도 그렇게 저장을 해놨지. 그런데 이제는 거기다 ‘똑똑한 딸’에다 ‘착한 딸’까지 더해졌어. 이 엄마를 데리고 77일간이나 남미 여행을 하다니 말이야. 그 덕에 이렇게 인터뷰도 하는 거잖아.”

엄마와의 여행을 결심하게 한 사건

“2017년 6월 7일에 떠났으니까 여행 다녀온 지 벌써 4년이 넘었네요. 그런데도 아직도 생각이 많이 나세요?”

“그럼, 이 엄마는 아직도 아주 생생~해. 엄마가 그래도 그전까지 동유럽도 가보고, 미국에 그랜드 캐니언도 보고 오고, 중국 여행도 해봤잖아. 그런데 우리 이쁜 딸이랑 함께 한 남미 배낭여행하고는 비교가 안 되더라고. 그전에는 모두 패키지 여행이었거든. 패키지로 가면, 그렇게 바쁠 수가 없어. 버스 타고 가다가, 내려주면 얼른 구경하고 다시 타고, 밥 먹으라고 하면 먹고, 쇼핑하러 가라고 하면 쇼핑하고. 그렇게 시키는 대로 돌아다니다 보면 눈에 넣는 건 많은데 마음에는 안 남더라고.”

“맞아요. 이렇게 몸으로 부딪히는 배낭여행을 하고 나면 그 이전으로는 못 돌아가더라고요. 그것도 그 거칠다는 남미를 8개국이나 돌았잖아요. 브라질에서 시작해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칠레, 볼리비아, 페루, 쿠바, 멕시코까지. 영어도 안 통하고, 치안도 좋지 않은 데다, 대부분 고산지대라서 건강도 조심해야 하니 여행 난도로 따지면 아주 고난도인 나라들을요. 게다가 엄마 나이 예순세 살에!”

“다들 얼마나 나를 부러워하는지 몰라. 실은 엄마가 2007년쯤 동유럽 여행을 갔을 때 ‘나도 내 딸이랑 여행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거든. 그때 여행 온 모녀를 보니까 그렇게 부럽더라고. 그런데 딱 10년 지나서 그 소원을 이뤘으니 엄마가 얼마나 좋았겠어. 근데 우리 이쁜 딸, 어떻게 엄마랑 여행할 생각을 했어?”

“여행 가기 몇 달 전에 엄마가 당한 자동차 급발진 사고 때문에요. 전화받고 집으로 달려가면서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어요. 크게 다친 곳이 없어서 다행이었죠. 그때 엄마가 저를 보면서 ‘괜찮다’고는 했지만, 엄마 얼굴이 얼마나 창백했는지 아세요?”

“맞아. 딸한테는 아무렇지 않다고 했지만, 엄마도 너무 놀라서 머릿속이 백지장이었어. 운전한 지 30년이 넘었으니 나름 베테랑이라고 생각했는데 급발진 사고가 나다니. 시동을 켜자마자 브레이크가 듣질 않는 거야. 전봇대 앞에서 차가 멈췄기에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어떻게 됐을지 아찔해.”

‘언젠가’가 아닌 ‘지금’

“그때 저는 여러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사고는 언제든 또 생길 수 있는데 그때 엄마와 추억이 하나도 없다면 얼마나 후회될까.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엄마와 무얼 해야 할까. 나는 엄마를 얼마나 잘 알고 있나’ 같은. 게다가 그 차가 제가 하던 학원 봉고차였잖아요. 딸이 학원 운영한다고 엄마가 직접 학원 차까지 몰았죠. 많을 땐 하루에도 열 번 이상씩 학생들을 실어 날랐으니 얼마나 고됐을까, 내가 엄마를 너무 고생시킨 건 아닐까 후회도 됐어요.”

“그래서 엄마한테 지금 제일 해보고 싶은 게 뭔지 물었던 거야?”

“네. 한 달쯤 고민을 했었죠. 그 사고가 어떤 신호처럼 느껴졌거든요. 학원도 접고, 엄마와 뭔가 해봐야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엄마가 파라과이에 있는 외삼촌을 만나러 가고 싶다고 했잖아요.”

“열 살이나 차이 나서 내겐 아들 같은 막냇동생이니까. 그 동생이 멀고 먼 파라과이에 있는데 대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내 눈으로 보고 오고 싶더라고.”

“그 말을 듣고 제가 ‘생각 좀 해볼게요’라고 했잖아요. 고민이 좀 됐거든요. 나이 예순이 훌쩍 넘은 엄마와 남미에 있는 파라과이에 간다고? 비행기도 두 번이나 갈아타야 하는 먼 곳을? 엄마 무릎이 버틸 수 있을까. 반면, 이런 생각도 들었죠. 남미는 내가 한 번쯤 꼭 가보고 싶던 곳이잖아? 외삼촌만 보고 오는 게 아니라 이 기회에 엄마와 남미 여행을 하면 어떨까. 그동안 여행할 때마다 엄마 생각이 나긴 했잖아. ‘언젠가’가 아니라 ‘지금’ 엄마와 떠나자. 그렇게 고민을 거듭한 끝에 3개월쯤 여행을 해보기로 한 거죠. 엄마와 살가운 사이가 아니라 부담스럽고 걱정이 되긴 했지만.”

“엄마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어. 내 딸만 따라다니면 된다고 생각했거든. 하하. 엄마가 지레 겁먹는 성격도 아니고.”

남미 가는데 미숫가루는 왜 챙겨요

“그런데 짐을 쌀 때부터 한숨이 나왔어요. 엄마가 외삼촌 준다고 미숫가루를 4㎏이나 쌌잖아요. 엄마 짐의 대부분을 차지했다고요. 엄마는 무릎이 아프니까 짐은 전부 내가 들어야 하는데 말이에요. 저걸 이고 지고 갈 생각을 하니 아찔했죠. 엄마, 남미가 옆집인 줄 아셨던 거예요?”

“하하. 나는 그저 내 동생 먹일 생각만 한 거지. 그 미숫가루, 어디서 산 것도 아니란 말이야. 내가 뽕잎, 쑥, 옥수수, 서리태, 맵쌀, 찹쌀, 보리쌀까지 무려 일곱 가지를 넣고 빻은 미숫가루였거든. 파라과이는 더운 나라라고 하니까 이 영양가 많은 미숫가루를 얼음물에 타서 먹으면 내 동생이 얼마나 시원할까 그 생각만 한 거야.”

“결국 브라질 공항 검역에서 마약으로 의심받았잖아요. 하하. 겨우 검역관들에게 미숫가루가 뭔지 설명하고 맛도 보게 해서 통과한 거지. 그 뒤에도 파라과이에선 선물하신다고 50g짜리 커피 30봉지에다, 코코넛 비누도 1㎏이나 샀잖아요. 결국 볼리비아 입국할 때 검역관들에게 다 빼앗길 걸.”

“그래도 우리 딸은 엄마한테 ‘왜 그런 걸 가져가려고 하느냐’ ‘무슨 커피를 그렇게 많이 사느냐’고 짜증 한 번 안 냈어. 다들 우리한테 3개월 여행하는 동안 많이 싸우지 않았느냐고 묻던데, 한 번도 안 싸웠잖아. 그게 다 착한 딸 덕분이지.”

“그런데 난 첫 여행지 브라질에 딱 내리자마자 엄마한테서 의외의 모습을 봐서 신기했어요. 한국에서는 호탕하고 말도 잘하는 엄마가 너무나 조용하고 얌전하게 계셔서 정말 귀여웠다니까요. ‘여기선 내가 엄마의 보호자구나’ 실감이 됐어요.”

“남미는 영어권도 아니고 스페인어권인 걸 알았어야 말이지. 우리 딸은 언제 스페인어를 배워서 그렇게 말도 잘하는지. 엄마가 참 자랑스러웠어. 엄마는 말을 할 줄 아나, 글씨 읽을 줄을 아나.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네 옆에 딱 붙어서 얌전히 따라다니는 거지. 남미엔 동양인도 거의 없더라. 한국 사람도 한국인 민박에나 가야 볼 수 있고 말이야. 그런 엄마 때문에 한국인 민박에서 묵은 거지?”

“그랬죠. 나 혼자였다면 현지 분위기를 느끼려고 안 갔을 텐데 말이에요. 엄마를 생각해서 현지에서 택시도 많이 타고 다녔죠. 초반에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엄마가 걸어 다녀도 괜찮겠다고 해서 그랬다가 정말 큰일 날 뻔했잖아요. 엄마가 다음 날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로 힘들어하는 걸 보고서요. 그다음부터는 걷는 걸 줄이고, 엄마가 피곤해하면 하루 정도 쉬기도 하면서 완급 조절을 했죠. 덕분에 나 혼자 여행할 때보다 좀 더 편하고 안전하게 다니기도 했어요.”

“나도 ‘마음은 청춘인데 몸이 따라주질 못하는구나’ 싶었어. 갑자기 배탈이 나거나 소변이 마려워서 고생한 적이 많았지. 나이 드니 생리 현상이 잘 조절이 안 돼. 브라질에서 파라과이로 넘어갔을 때는 갑자기 오줌 소태가 나서 약 먹고 나았잖아. 볼리비아 우유니 소금사막에서 수도 라파스로 가는 비행기 안에선 갑자기 목소리가 안 나오기도 했던 거 알아? 너 걱정할까 봐 엄마가 내색을 안 했지. 속으로 ‘이렇게 영영 말을 못 하게 되는 거 아닌가’ 했지. 비행기 내려서는 괜찮아지더라. 한라산과 백두산을 합친 것만큼 높은 곳이라니 고산병의 증세 중 하나인가 싶었어. 그래서 여행은 하루라도 젊을 때 해야 하는 거야.”

‘엄마란 이런 존재구나’

“엄마와 여행하면서 내가 몰랐던 엄마의 모습을 본 것도 참 좋았어요. 그거 기억 나세요? 멕시코 칸쿤 ‘여인의 섬’으로 가는 유람선 안에서 말이에요. 여행객을 즐겁게 하려고 이벤트가 열렸는데 각국 노래를 틀어주면서 춤을 시켰잖아요. 동양인은 우리뿐이었는데, 우리가 한국 사람이라는 걸 안 사회자가 “Korea?”라고 하더니 갑자기 싸이의 ‘강남 스타일’을 틀었죠. 그때 엄마가 갑자기 번개처럼 일어나서 ‘말춤’을 추시는 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

“어쨌든 거기서는 우리가 한국 대표가 된 건데 주뼛주뼛하면 되겠어? 하하.”

“저는 동영상으로 방방 뛰면서 춤추는 엄마를 찍으면서 속으로 ‘어디서 저런 힘이 나오나’ 했다니까요. 근데 엄마, 그거 알아요? 난 여행 초반엔 ‘여기선 내가 엄마의 엄마구나’ 싶었거든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순간까지도 나는 엄마에게 의지하고 있더라고요.”

“언제 그런 생각을 했어?”

“여행하면서 나도 모르게 엄마에게 불평을 늘어놓거나, 투정을 부리는 때가 있더라고요. 나 혼자 다닐 때는 오히려 더 의젓했는데 말이죠. 멕시코에서 엄마가 ‘핑크 라군’(핑크빛 호수)에 가보고 싶다고 해서 다른 한국인 여행객 세 명과 차를 빌려서 갔었잖아요.”

“맞아. 그때 운전할 줄 아는 사람이 나뿐이라 내가 운전을 했었지. 근데 가는 길이 엄청 험난했잖아. 중간에 자동차 바퀴에 구멍이 나질 않나, 차 범퍼가 갑자기 내려앉질 않나. 그래도 그때마다 지나던 멕시코 사람들이 도와줘서 위기를 잘 넘겼어. 그땐 정말 ‘천사가 왔다 갔나’ 싶었다니까.”

“그랬죠. 그때 전 그런 사고들 때문에 계속 속이 탔거든요. 애초에 부실한 차량을 빌려준 것 같은데도 렌터카 업체가 보상하라고 하면 어쩌나 걱정도 들고 말이에요. 그런데 동행자들은 ‘나몰라라’인 거예요. 풍경이나 자기들 사진 찍는 데만 몰두하고요. 어차피 사람도 내가 모으고, 차도 내가 빌린 거지만, 그래도 너무하다 싶었죠. 그래서 그들과 헤어지자마자 엄마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불평을 늘어놓았죠. 엄마도 ‘얘한테 이런 모습도 있구나’ 했었죠?”

“그런 너를 보고 엄마도 얼마나 안쓰러웠는지 몰라. 혼자서 모든 책임을 다 짊어졌구나 싶어서.”

“그때 엄마가 ‘너만 이렇게 고생을 해서 어떡하니’라고 해줬죠. 그때 기억이 참 많이 나요. ‘나 혼자였다면 속으로 삭히고 말았을 텐데, 엄마랑 여행하니까 이런 순간에도 엄마에게 내 속을 다 드러내게 되는구나. 내가 엄마의 보호자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네. 내 모든 감정을 받아 줄 수 있는 사람이 엄마구나. 내가 때로 철부지가 될 수 있는 게 엄마 덕분이구나. 엄마는 이런 존재구나’ 싶었어요.”

여행을 다녀오니 대화가 바뀌다

“그런 기억과 감정들이 쌓여서 그런지 이제는 딸 셋 중에 네가 제일 편하다니까. 떨어져 산 지도 오래 됐고, 어려서부터 워낙 말 수도 적었잖아.”

“맞아요. 여행가기 전에는 엄마에게 전화도 거의 하지 않았죠. 친구들이 거의 매일 엄마와 통화를 한다기에 깜짝 놀랐어요. 엄마가 전화를 해서 ‘잘 지내?’ ‘밥은 먹었고?’ ‘좋은 하루 보내라’ 해도 저는 늘 ‘네’ ‘네’ ‘네’만 하다가 끊곤 했죠. 그렇게 별로 말도 없고, 서먹한 사이여서 여행 내내 안 싸우지 않았나 싶기도 해요.”

“여행 다녀 오고 나서는 우리 사이에 말이 진짜 많아졌잖아. 엄마는 그래서 남미 여행이 우리의 ‘대화의 장’이 된 듯한 기분이야. TV 여행 프로그램에서 우리가 간 곳이 나오기라도 하면 얼른 전화해서 ‘지금 무슨 채널 틀어봐. 우리 갔던 우유니 소금사막 나온다’ 하면서 그때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고 말이야. 함께 밥 먹다가도 불쑥 여행 추억이 떠올라서 수다를 떨기도 하고. 4년이 지났는데도 엄마는 엊그제처럼 생생해. 여행 중에 매일매일 일기를 써서 더 그렇기도 한가 봐.”

“전에는 친구 같은 모녀가 어떤 사이인지 잘 이해가 안 됐거든요. 엄마는 그저 내게 ‘서먹한 어른’ 같았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엄마’ 하면 떠오르는 감정이 더 풍부해졌어요. 친구 같기도 하고, 엄마 같기도 하고, 여자로서 동질감이 느껴지기도 하고요. 여행을 해보지 않았더라면 느끼지 못했겠죠.”

“나도 전에는 ‘이쁜 딸’ ‘이쁜 딸’ 하기는 했지만, 너를 보면서 이렇게 힘줘서 ‘이쁜 딸’이라고는 못했거든. 그런데 지금은 ‘내 이쁜 딸, 똑똑한 딸, 착한 딸’ 같은 말이 진심으로 우러나와.”

“저 평생 할 효도 다 한 거죠? 하하하. 상투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들도 꼭 엄마와 여행을 해보면 좋겠어요. 일상에서는 느낄 수 없고 볼 수 없는 엄마를 만날 수 있으니까요. 여행을 했다는 건 시간을 공유했다는 의미잖아요. 그 시간 속에서 느낀 친밀감은 정말 농도가 짙어요.”

“여행을 하면서 어딜 가나 엄마가 최고령자였잖아? 우리를 보면서 다른 청년 여행자들이 ‘나도 엄마랑 꼭 여행 와야겠어요’ 했었지. 누구나 마음은 있지만 여건이 따라주지 않아서 못하는 경우도 많잖아. 그래서 딸과 함께 남미 여행을 할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몰라. 엄마 친구들도 얼마나 많이 부러워하는데.”

같은 풍경, 다른 생각

“엄마는 여행 중에 언제가 제일 행복했어요?”

“칸쿤! 그 옥빛 바다가 아직도 눈에 선해.”

“저도 그래요. 우리의 마지막 여행지였죠. 칸쿤은 원래 신혼여행지로도 유명한 휴양지잖아요. 그간 민박을 돌며 고생했으니 칸쿤에선 엄마와 좋은 호텔에 한번 가보고 싶더라고요. 고민 끝에 1박에 한화로 55만 원이나 하는 고급 호텔에서 하루 묵기로 했죠. 저녁에 해변에 앉아 바다를 보는데 엄마가 ‘아, 정말 좋다’를 반복하는 거예요. 그걸 보고서 ‘엄마랑 여행 오기 정말 잘했다’ 싶었어요.”

“엄마는 실은 그때 가장 처음에 든 생각은 미안함이었어. 아이들 데리고 온 가족 여행객들을 보고서 ‘우리 아이들도 좀 부유한 부모를 만났더라면, 어릴 때 이런 좋은 곳에 놀러 왔을 텐데’ ‘좀 더 잘 살았더라면, 우리도 진작 가족 여행을 왔을 텐데’ 싶었던 거야. 그다음에 든 감정이 감탄이었지. ‘이렇게 맑은 물을 두고 어떻게 한국으로 가나’ 할 정도로.”

“엄마가 그런 생각을 한 줄 몰랐어요. 저는 그런 바다를 볼 수 있게 해드려서 기쁠 뿐이었는데. 엄마 얘길 들으니 갑자기 울컥해요.”

“여행 내내 ‘내가 셋째 딸을 안 낳았으면 어쩔 뻔했나’ 얼마나 감사했다고. 여행자들의 마지막 로망이라는 남미까지 다녀왔으니 기적이지 뭐야. 엄마는 지금도 그 여행을 추억하면서 오늘을 산다.”

“저도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엄마와 다른 여행을 꿈꾸게 되더라고요. 그전에는 엄마나 가족이랑 여행을 간다는 건 상상도 하지 않았거든요. 지금은 코로나19 때문에 여행이 자유롭지 못하지만, 앞으로 엄마에게 또 다른 추억을 만들어 드리고 싶어요.”

‘내 딸, 나 데리고 또 여행 가줘!’

“우리 이쁜 딸, 또 엄마 데리고 여행 가줄 거야? 엄마 얼마 전에 무릎 인공관절 수술도 해서 더 쌩쌩하게 잘 다닐 수 있어!”

“엄마, 또 여행해보고 싶은 곳 있어요?”

“브라질 갔을 때 이구아수 폭포를 봤잖아. 나이아가라 폭포는 이미 가봤으니, 세계 3대 폭포 중에 1곳만 남았네.”

“네? 그럼 아프리카 대륙 (잠비아와 짐바브웨의 경계를 흐르는) 빅토리아 폭포를 가시겠다고요? 헉, 아프리카는 남미보다 더 ‘센’ 곳인데! 다음 번엔 편하게 동남아 휴양지를 가려고 했다고요. 하하.”

“(미소를 지으며) 이제는 미숫가루도 안 챙기고, 커피나 비누 같은 것도 안 살게! 엄마 꼭 데리고 가 줘.”


김지은 인스플로러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