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대에서 얻은 목숨... '배바위 정자'에 인생을 바쳤다

입력
2021.08.17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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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시골의 명물, 주암정과 한옥 카페 화수헌

문경에서 산양면은 관광지 축에 들지 못하는 지역이다. 높은 산도, 깊은 계곡도 없다. 이름처럼 볕 좋은 평범한 시골이다. 내세울 것 없는 산양면이, 그것도 면 소재지에서 3㎞나 떨어진 한적한 시골마을이 요즘 문경의 ‘핫플레이스’로 뜨고 있다. 바위에 올라앉은 아담한 정자와 한옥을 개조한 카페가 입소문을 타면서 외지인의 발길이 심심찮게 이어지고 있다.

첫 번째 주인공은 주암정(舟巖亭)이다. 1944년에 세웠으니 그리 오래된 건물은 아니다. 1칸 같은 3칸짜리 자그마한 누마루에 불과한데, 배 모양으로 날렵한 바위에 올라앉은 모양이 단아하고, 바로 앞에 연못과 정원을 정갈하게 가꾸어 놓았다. 물안개 끼는 새벽이나 부슬비가 내리는 날이면 운치를 더해 전국에서 사진작가들이 찾아오기도 한다.




주암정은 조선시대의 유학자 채익하(蔡翊夏ㆍ1633~1676)를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그의 호를 따서 지었다. 예종 때 관시, 회시, 전시에 장원급제한 인물이다. 지금 정자 옆 능소화는 꽃잎이 거의 떨어지고, 바위 아래 아담한 연못에는 은은하게 연꽃이 피어 있다. 연못을 두르고 있는 개울에는 맑은 물이 흘러 청량한 기운을 선사한다. 정자는 애초 바로 앞의 강과 맞닿아 있었는데, 제방을 축조하면서 멀어지게 됐다. 연못과 제방 사이 공터는 공원처럼 꾸며 소소하게 산책을 즐길 수 있다. 주변에 심은 자귀나무 주목 향나무 목련 벚나무 등이 연륜을 더해가고 있어 계절 따라 그윽한 운치를 자랑한다.

주암정이 보잘것없는 시골 정자로 버려지지 않고 이름을 알릴 수 있었던 데에는 채익하의 12대 종손 채훈식(78)씨의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그는 1977년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정자와 주변을 가꿔 오고 있다. 한낮 무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13일 정원에서 잡풀을 뽑고 있던 채씨를 만났다. 허리에 보호대를 두르고 있는 모습이 한눈에도 몸이 성치 않아 보였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부터 허리디스크를 앓았다. 용하다는 병원을 두루 다녔지만 고칠 수 없다는 말만 들었다. 평생 밥벌이도 하지 못할 거라는 절망감에 1976년 모진 마음을 먹고 속리산 문장대에 올랐다. 사실 그 자체가 죽을 만큼 힘든 과정이었다.

마지막 순간을 앞두고 바위 끝에 앉았는데, 평생 써본 적 없는 시(詩)가 떠올랐다. ‘세월은 흘러 백발이 되었는데, 문장대 바위 너는 무슨 약을 먹고 늙지 않았느냐.’ 한탄조로 읊었다. ‘늙지는 않았으나 보고 싶은 사람 있어도 찾아가지 못하는데, 너는 발이 있어 이곳까지 왔으니 나보다 낫지 않느냐.’ 환청인지 실제인지 알 수 없는 답이 돌아왔다. ‘남은 인생 즐겁게 살다 가라’는 마지막 말이 아직도 귓전에 생생하다고 했다. 평생을 고통으로 살게 될 거라는 괴로움에 죽으려고 올랐던 그곳에서, 그는 저절로 그칠 때까지 실컷 목놓아 울고 내려왔다.

그때부터 할 일이 생겼다. 주암정을 가꾸는 일이었다. 문장대 바위에게 공덕을 갚는 심정으로 정자를 받치고 있는 ‘배바위’에 정성을 기울였다. 물을 잃은 배를 위해 연못을 파고, 강가에서 돌멩이를 날라 축대를 쌓고, 공터에 나무를 심고 잔디를 가꿨다. 기계의 힘을 빌리면 한두 달 안에 뚝딱 끝날 일이지만, 불편한 몸으로 모든 걸 맨손으로 하자니 축대 하나 완공하는 데 몇 년이 걸렸다. 돈 한 푼 되지 않는 일이라 아내의 원망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도 조상 이름을 알리고, 전국에서 찾아와주니 그걸로 보람 있는 인생이지요.” 그게 고마워서 입장료를 받기는커녕 도리어 방문객에게 믹스커피를 대접하고 있다. 주암정이 아름다운 건 한 사람의 인생이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이리라.

주암정이 언제까지 정갈하게 관리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팔순을 코앞에 둔 채씨는 이제 풀 뽑는 것도 쉽지 않다고 했다. 관광지를 관리하는 공공근로 지원이라도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게 요즘 그의 작은 소망이다.

강 건너편 현리마을에는 1790년에 지은 고택을 활용한 한옥 카페 ‘화수헌’이 있다. 꽃과 나무가 만발한 가옥이라는 뜻이다. 주방으로 쓰는 안채, 본채 마루와 작은 방들이 모두 차 마시기 좋은 아늑한 공간이다. 마당에는 잔디를 깔고 차양을 쳐서 노천 카페로 활용한다.



시골마을에 카페가 들어선 건 2018년이다. 경상북도의 ‘도시 청년 시골파견제’ 사업에 응모한 다섯 청년이 문을 열었다. 부산의 대학에서 만난 이들은 일을 벌이기 전까지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도 해본 적이 없었다. 젊음만 믿고 ‘맨땅에 헤딩’한 셈이다. 김보민 팀장은 운이 좋았다고 했다. 마침 ‘이색 카페 투어’ 바람이 불었고, 코로나 시대에 아무것도 없는 조용한 동네라는 점이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한 것 같다고 했다.

문경 시골로 간다고 했을 때 ‘미쳤다’고 했던 친구들에게 이제는 시골살이도 나쁘지 않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교통이 잘 돼 있으니 시골이라고 불편하거나 고립된 느낌은 없어요. 화려함보다 조용한 삶을 선호하는 청년이라면 소도시에서 시작하는 것도 괜찮을 거 같아요.”




5명으로 시작한 청년 기업 ‘리플레이스’는 현재 15명의 직원을 거느린 업체로 성장했다. 화수헌 외에 산양면 소재지에 카페와 셀프 사진관을 운영하고 있다. 옛 양조장 건물을 개조한 ‘산양정행소’는 제과점 겸 카페다. 갤러리처럼 높은 천장과 넓은 공간이 매력이다. 건물의 역사를 되새기는 의미에서 막걸리 식빵과 쌀 라테를 대표 메뉴로 하고 있다. 문경의 여러 공방에서 생산한 생활소품도 판매한다. 길 건너편 셀프 사진관 ‘볕드는산’ 역시 옛 금융조합 사택을 개조한 건물이다.

문경= 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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