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업그레이드된 '탈레반 2.0'... 주판알 튕기는 주변국들

입력
2021.08.17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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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간 사태, 전문가 기고]  
박현도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 연구교수
'거칠고 야만적, 영어 사용도 불가능했지만...
20년 만의 변신...유창한 영어, 국제사회 소통'
'제국의 무덤'이지만, '정복자의 요충지'
'눈에서 멀어지면 미워하지 않을 것'...
美 바이든도 이 말 되새기고 있을까

1996년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했다가 2001년 9·11 직후 오사마 빈 라덴 색출 작전을 편 미군에 패해 물러난 탈레반이 다시 등장했다.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 반가울 리 없다. 미국 언론인 세바스찬 융거(Sebastian Junger)는 “아프간 사람들과 싸우는 것은 젤리를 벽에 박는 것과 같다. 결국에는 구부러진 못으로 가득 찬 벽만 남는다”고 했다. 젤리는 녹아 사라지고, 결국 원하는 목적을 못 이룬다는 뜻이다. 아프간은 지금 탈레반만 남은 형국이다.

탈레반은 아랍어로 학생을 뜻하는 ‘탈립’에 페르시아어 복수형 어미 ‘안’이 붙은 파슈툰어(Pashto)로, 마드라사(이슬람 종교학교) 학생들이란 뜻이다. 1979년 소련의 아프간 침공 때 미국은 반(反)소련 항쟁을 돕고자 파키스탄에서 소련에 대항하는 무자헤딘(전사)을 훈련시키고 지원했다. 1989년 소련 철군 후 정정 불안이 계속되면서 군벌들의 횡포가 만연하자 무자헤딘으로 참가했던 마드라사 학생들이 1994년 자경단을 만든 것이 탈레반의 기원이다.

아프간을 통치할 때 탈레반은 과거지향적 종교관으로 주민 삶을 통제했다. 최대 희생자는 여성과 시아파 무슬림이었다. 교육과 직업의 자유를 빼앗긴 채 ‘2세 생산도구’로 전락했다. 시아파는 이단이나 무신론자보다 못한 불신자로 박해받았다. 탈레반은 거칠고, 야만적이었다. 영어가 가능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어 국제사회와 소통도 어려웠다.

그러나 15일(현지시간) 카불을 장악하고 종전을 선언한 ‘탈레반 2기’는 20년 전 실패에서 배운 듯, 국제사회와 유창한 영어로 대화하고, 통합정부를 말하며, 여성과 반탈레반 세력에 협조한 주민의 안녕을 약속하는 등 사뭇 세련된 모습을 보여준다. 경제 재건과 국제협력 의지를 밝히는 탈레반이 과거지향적인 경직된 이슬람 해석을 내려놓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다만 겉으로 보기엔 ‘탈레반 2.0’으로 부를 수 있을 만큼 업그레이드된 언행을 보여주는 점은 인상적이다.

7월 8일 바이든 미 대통령은 탈레반이 쉽게 아프간을 넘볼 수 없는 이유로 20년간 880억 달러(약 102조 원)를 들여 양성한 아프간 정규군 30만 명을 들었다. 그러나 정부의 부패 때문에 불과 일주일 만에 군이 무너졌다. 미국이 지원한 카불 정부의 행정력은 수도 밖에선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군경 월급은 6개월째 밀렸다. 게다가 미국이 군대 철수를 선언하자 자포자기한 정부군은 안전과 급여를 보장하겠다는 탈레반의 유혹에 무기를 건네줬다. 상관이나 지역 행정 고위층이 탈레반에 항복한 상태에서 결사 항전은 무의미했다.

미국이 없는 아프간을 두고 주변국은 열심히 주판알을 튕기고 있다. 탈레반을 지원하고 좌지우지해온 파키스탄이지만, 새로운 탈레반 정권과 마냥 좋을 수만은 없다. 2,430㎞라는 기나긴 국경선을 공유하는 파키스탄은 영국이 그어놓은 1893년 듀란드선(Durand Line)을 탈레반이 지킬지 고민스러울 것이다. 듀란드선 동쪽 파키스탄에는 4,000만 명에 달하는 탈레반의 주류를 이루는 파슈툰족이 살고 있다. 파키스탄은 그동안 아프간 때문에 미국의 주목과 지원을 받았는데, 이젠 그런 관심 없이 홀로 아프간을 대해야만 한다.

921㎞의 국경선을 맞대고 이미 300만 명이 넘는 아프간 난민을 수용하고 있는 이란은 시아파 하자라족을 박해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나섰다. 종교지도자들은 탈레반을 반대하지만, 정부는 일단 유화책을 쓰고 있고, 정부의 정책을 설명하며 이해를 구했다. 투르크메니스탄(국경선 804㎞), 우즈베키스탄(144㎞), 타지키스탄(1357㎞) 등 러시아 영향권 국가들 역시 탈레반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은 가니 대통령의 망명을 받아들였다. 타지키스탄은 아프간과 유전을 공유하고 있다. 러시아는 타지키스탄에 군사기지를 운용 중이다. 아프간에서 돌발사태가 일어나면 러시아 역시 방관할 수 없는 상황이다.

중국은 91㎞라는 가장 짧은 국경선을 맞댔지만, 신장 지역과 이어지는 와한회랑은 두말할 것도 없이 민감한 곳이다. 탈레반이 이슬람주의를 앞세워 신장 위구르 무슬림을 지원이라도 한다면, 중국으로선 난감하다. 인도 역시 같은 고민이다. 이슬람을 앞세워 카슈미르 문제에 탈레반이 개입하면 대세를 그르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중국과 인도 모두 탈레반에 유화적 자세를 취하고 있다.

내륙국가 아프가스탄을 제국의 무덤이라고들 하지만, 정복자의 고속도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통팔방의 요충지란 점 또한 잊어선 안 된다.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를 잇는 전력선, 투르크메니스탄에서 파키스탄, 인도에 이르는 가스파이프 라인,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인도 북부에 닿는 석유파이프라인이 지나는 곳이 아프간이다. 게다가 페르시아만의 3분의 1에 달하는 약 2,000억 배럴의 원유가 묻혀 있고, ‘리튬의 사우디아라비아’로 불릴 정도로 21세기 광물의 꽃 리튬의 보고다.

1880년 영국-아프간 전쟁 시 영국의 로버츠(Roberts) 장군은 이렇게 말했다. “아프간 사람들은 우리를 보지 않을수록 우리를 덜 싫어한다는 내 말이 옳다. 러시아가 아프간을 정복하거나, 아프간을 거쳐 인도를 침략하려고 한다면, 아프간 사람들이 우리에게 이로울 것이다. 우리가 간섭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어쩌면 바이든 대통령은 눈에서 멀어지면 미워하지 않을 것이란 로버츠 장군의 말을 되새기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제 진정한 아프간 열전의 막이 올랐다.



박현도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