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사나 조력자살에 대한 정서적 반감은, 죽음 자체에 대한 본능적·비이성적 거부감 외에도, 20세기 초 구체화한 사회진화론과 우생학적 기획, 또 그걸 실행한 나치의 1930~1940년대 만행의 트라우마 탓이 크다. 그 시작은 'T4작전'이라 불리는 장애인 멸절 작전이었다.
나치의 장애인 학살은 1933년 지적장애인을 시작으로 지체장애인까지 2차대전 기간 내내 조직적, 준합법적으로 자행됐다. 희생자는 20여 만 명. 비유대인 독일 국민도 유대인에 비해선 다소 엄격한 기준의 적용을 받긴 했지만, 결코 예외가 아니었다. 나치에게 그들은 아리안 민족의 우월성을 훼손하는 존재였고, 시설 수용 비용 등으로 사회와 국가에 부담을 끼치는 '짐'이었다. 나치는 1930년대 중반 '인종정치사무소'를 설립해 장애인과 유전·정신질환자의 배제를 정당화하는 다양한 선전 작업을 본격화하며 여론, 특히 종교단체의 반발을 무마했다. 독일 각 주는 1932년 이래 경쟁적으로 열등한 존재의 강제 불임 등 단종 조치를 합법화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전쟁은 이 기획에 이상적인 환경을 제공했다. 나치는 1939년 8월 18일 선천성 기형·유전질환자 등록위원회를 설립, 9월부터 'T4작전'을 시작했다. 학살 본부가 있던 베를린 '티어가르텐 4번지'에서 이름을 따 T4작전이라 불린 이 기획은 강제불임, 단종을 넘어 노골적인 학살 작전이었고, 제국의 적잖은 의학자와 의사들이 작전을 기획하고 이끌었다.
나치 돌격대를 거쳐 친위대에서 근무하며 히틀러의 개인 주치의가 된 프라이부르크대학 출신 의사 카를 브란트(Karl Brandt, 1904~1948)가 대표적인 인물. 그는 T4작전의 감독관으로서, 학살 대상자를 상대로 악질적인 생체실험까지 자행했다. 그는 전후 전범재판에서도 자신의 행위를 인류 복지와 국가의 안녕을 위한 충성심의 발로였다고 정당화했고,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됐다. T4작전은 독일 국내 종교지도자 등의 반발로 히틀러에 의해 1941년 8월 공식적으론 중단됐지만, 실제론 전시 내내 비공식적으로 지속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