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 얻고 20년, 말기암까지... 마지막 평온을 준 호스피스 

입력
2021.08.24 17:00
25면
<26> 김경화 간호사

편집자주

의료계 종사자라면 평생 잊지 못할 환자에 대한 기억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생명을 구한 환자일 수도 있고, 반대로 자신에게 각별한 의미를 일깨워준 환자일 수도 있다. 아픈 사람, 아픈 사연과 매일 마주하는 의료인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어느 봄날, 내가 다니는 성당의 수녀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노모와 단둘이 시골에서 살던 50세 미혼 남성이 간암 치료를 받다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황달에 팔다리가 붓고 배에 복수가 차 당장 입원 치료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치매에 걸린 그의 어머니는 아들과 헤어질 수 없다며 고집을 부려 병원 입원이 쉽지 않다고 했다.

종합병원의 외래부 간호책임자로 있는 나는 수녀님 소개로 환자의 누나와 상담을 했고, 입원보다는 당장 호스피스 치료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환자의 누나는 동생의 애처로운 사연을 털어놓았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많이 배우지 못한 동생은 도시로 나가 온갖 노력 끝에 중국집을 운영할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음식 배달을 가던 중 교통사고로 머리를 심하게 다치는 바람에 인지기능이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로 떨어졌고, 신체 일부마저 잃어 재기가 힘들게 됐다. 그의 상황은 가족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고, 삶의 터전도 고스란히 잃어 지난 20년간 노모의 보살핌을 받았다고 한다.

더욱이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각종 보험 대출 사기에 휘말려 가족들을 힘들게 했다. 설상가상으로 아들을 결혼시켜 보겠다는 노모의 노력은 사기를 당해 얼굴도 모르는 해외 여성과 서류상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막상 호스피스 치료를 준비하다 보니 여러 문제가 가로막았다. 우선 간암으로 치료받던 지방 대학병원에서 호스피스가 필요하다는 소견서를 받아야 했다. 둘째, 정작 본인은 얼굴 한 번 본 적도 없는 서류상 배우자의 입원 동의가 필요했다. 셋째, 의식이 있는 경우, 본인이 ‘말기암인지 알고 호스피스 치료를 원한다’는 의사 표시가 있어야 했다. 호스피스 입원을 기다리는 사이 환자의 상태는 더욱 악화됐고,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소견서는 대학병원의 담당 의사가 해외 출장 중이라 당장 받기 어려웠다. 환자의 누나는 “우리에겐 하늘이 기회를 안 주나 보다”고 울며 한탄했다. 다행히 사정을 안타깝게 여긴 그 병원의 외래 간호사와 전공의 선생님이 도움을 주셨다. 서류상 배우자의 동의가 필요한 부분은 변호사 사무실에서 이혼 진행 중이라는 확인서를 통해 해결해주었다.

환자의 첫인상은 그 힘든 장애의 세월을 보내고도 순수한 모습이었다. 힘들게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그는 “나는 어떠한 치료도 원치 않습니다. 호스피스로 입원하길 원합니다”라는 말을 국어책 읽듯 반복했다. 본인이 호스피스 치료를 받겠다는 의사 표시를 하기 위해 어눌한 말투로 외우고 또 외웠을 간절함이 느껴져 마음이 아팠다.

그는 점차 병원에서 안정을 찾았고, 예전보다 한결 편안해 보였다. 문병 간 나에게 “내 평생 가장 좋은 방에서 창밖 벚꽃 구경도 하며 좋은 대접받고 있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제대로 보살핌 받지 못했을 그의 지난 투병 생활이 그려졌다. 그의 병상에 꽃바구니를 보냈더니 “내가 좋아하는 보라색 꽃이고, 다른 환자들과 함께 보고 싶다”면서 병실 중앙에 꽃바구니를 놓아두었다. 같은 병실 환자들의 고맙다는 인사에 그는 어린아이같이 해맑게 웃으며 좋아했다.

입원한 지 2주도 채 되지 않은 어느 날 아침, 환자의 누나로부터 전화가 왔다. 동생이 조금 전 사망했다고. 그리고 “동생이 병원에서 평온하게 지내다 생을 마무리할 수 있게 도와줘서 고맙다”고 했다.

누나는 동생의 장례를 마친 뒤 찾아왔다. 동생이 2주간 머물다 편안히 잠든 호스피스 공간은 천국과 가장 맞닿아 있는 곳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늘 아들 걱정만 하던 노모도 치매가 망각으로 채워져 아들에 대한 기억을 온전히 잊고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고 했다.

그동안 급박하고 긴장된 병원 환경에서 일하며 치료 중심에만 매달린 것은 아닌가 하는 후회가 몰려왔다. 자신이 어떤 치료를 받고 있는지도 모른 채 항암제와 각종 고무호스를 주렁주렁 달고 사투를 벌이느라 인생 마지막 길을 가족들과 따뜻하게 이별할 시간조차 얻지 못하는 게 우리 현실이 아닌가. 치료가 더 이상 의미 없고 마지막 가야 할 길이 예정되어 있다면, 그들의 스토리 속에 들어가 인생의 마지막 여정을 존엄하게 유지하도록 돌봐 주는 게 옳지 않을까.

실제 말기암으로 고통 받던 나의 아버지에게도 나는 병의 진행 과정을 솔직히 털어놓지 못했다. 삶의 희망을 잃고 하루하루를 두려움과 체념으로 지내실 것을 걱정해서였다. 그러나 품위 있게 생을 정리할 시간, 가족 간의 화해, 남겨질 가족에게 전하고 싶었을 많은 지혜와 통찰력, 남은 시간 가족을 사랑한다는 말을 더 많이 할 기회를 드리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몰려왔다. 환자가 본인 상태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부분은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알려주고, 환자의 눈높이에 맞춰 충분히 공감한다는 표정으로 대해야 한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우리가 태어나기 위해 엄마의 배 속에서 열 달을 준비하듯, 평안하고 안락한 임종을 맞이할 수 있게 삶의 여정을 정리하는 마지막 시공간이 바로 호스피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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