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3월 다음 대통령을 뽑는 대선을 앞두고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사이에 때 아닌 '노무현 잡기' 경쟁이 치열하다. 양당 주자들 모두 유불리에 따라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을 습관적으로 거론하기 때문이다. 미래보다 과거에 치중하려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지만 양당 주자들은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다.
특히 최근 국민의힘 주자들이 노 전 대통령을 자주 언급하는 게 눈에 띈다. 대중에게 서민적이고 친근한 대통령이란 이미지를 활용해 지지층의 외연을 넓히려는 행보로 보인다. 노 전 대통령의 이미지를 가장 잘 활용하는 야권 주자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 측이다. 윤 전 총장은 몇 달 전만 해도 '노 전 대통령의 친구' 문재인 대통령과 대척점에 있던 인사다.
그런 그와 측근들이 노 전 대통령을 언급하는 건 일종의 보수 색깔 빼기로 풀이된다. 입당 전후로 '강력한 보수 주자'란 점을 강조해 온 터라 중도 표심을 잡으려면 지금과는 다른 이미지를 보여줄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과거 노 전 대통령을 비판했던 야권 정치인들이 노 전 대통령을 치켜세우며 윤 전 총장과 닮았다고 강조한다. 윤석열 캠프의 총괄실장인 장제원 국민의힘 의원이 대표적이다.
장 의원은 2017년 9월 '노 전 대통령이 부부싸움 끝에 자살했다'고 한 정진석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의원이 뭇매를 맞자 "노무현 대통령의 '노'자만 꺼내면 용서할 수 없는 역사의 죄를 지은 양 발끈하고 벌떼처럼 들고일어나 난리를 친다"고 반발했다.
이랬던 장 의원은 12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스케줄에 대한 얘기를 하기 위해 (윤 전 총장) 댁에 갔는데 라면도 끓여주셨다. 라면을 끓이면서 '계란 두 개?' 이렇게 말씀하신다"며 "굉장히 투박하고 직설적이고 서민적이다. 윤 전 총장을 보면 노 전 대통령과 닮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야권 주자 중 김태호 국민의힘 의원도 노 전 대통령을 꺼냈다. 김 의원은 대선 출마 선언 이후 지난달 28일 김해 봉하마을을 찾아 노 전 대통령 묘소를 참배했다. 방명록에는 '공존의 씨앗 꼭 심겠습니다'라고 적었다.
사실 노 전 대통령을 대선 경선 무대로 끌어들인 건 민주당이 먼저다. 민주당 주자들은 대선 후보 경선 초기에 '민주당 정통성'을 두고 경쟁했다. 자신이 '노무현 정신'을 이을 적임자라는 걸 강조해 당내 최대 세력인 친노·친문계 표심을 선점하려는 생각에서다.
이재명 경기지사 측은 이낙연 전 대표에게 노 전 대통령 탄핵 가담 의혹을 제기했다. 탄핵을 막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건 물론, 탄핵을 위해 한나라당(현 국민의힘)과 손을 잡았다고 주장했다. 정세균·김두관·추미애 예비후보도 공방전에 가세해 민주당 경선을 노 전 대통령으로 가득 채웠다. 민주당 주자들은 네거티브 공방이 가열돼 휴전 선언을 했지만, 이미 노 전 대통령은 네거티브의 소재가 된 뒤였다.
노 전 대통령의 사위 곽상언 변호사는 "노무현을 선거에서 놓아 달라"고 호소했다. 곽 변호사는 지난달 23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페이스북을 통해 "또 노무현 소환, 노무현을 기준으로 편 가르지 말고, 적대적으로 소비하지 말라"고 지적했다.
양당은 또 상대당을 공격하는데 노 전 대통령 카드를 꺼냈다. 국민의힘은 '노 전 대통령이었다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란 반문 화법으로 민주당이 내로남불 정당이란 점을 부각했다. 반면 민주당은 노 전 대통령을 조롱하고 폄하했던 국민의힘이 노 전 대통령을 거론하는 건 '모독'이라고 반발했다.
민주당이 추진하는 언론중재법 개정안(언론사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 처리 과정에서 노 전 대통령을 거론했다. 싸움의 발단은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의 발언이었다.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최고위원회의에서 "과거 노 전 대통령은 언론 다양성을 추구하는 정책을 폈다"며 "(언론중재법 개정안은) 노무현 정신과 어긋난다"고 말했다.
그러자 민주당에선 오히려 노 전 대통령 서거가 언론중재법 개정안이 필요한 이유라고 맞받았다. 이재명 경기지사는 "노 전 대통령 서거에도 가짜뉴스 영향이 있다"고 했고, 윤호중 민주당 원내대표는 "논두렁 시계 같은 가짜뉴스 수사정보를 흘리는 검찰의 인권침해나 그걸 받아쓴 언론의 횡포에 속절없이 당하신 게 노 전 대통령"이라며 이 대표를 성토했다.
정세균 전 국무총리와 이 대표는 이 과정에서 격한 설전을 주고받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정 전 총리는 1일 페이스북에 "당신들의 입길에 더는 노무현 대통령을 올리지 말라. 고인에 대한 명예살인이니 당장 멈추라"며 "노 전 대통령 탄핵을 주도하고,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막말로 조롱했던 당신들의 과거를 또렷이 기억한다"고 일갈했다.
이 대표는 이에 "정 전 총리께서 뭔가 착각한 것 같은데, 노무현 대통령님은 다양성을 기반으로 한 언론의 자체적 필터링을 추진하신 자유주의자"라며 "지금 민주당과 문재인 정부는 언론에 재갈을 물린다는 지적"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친노라면 노 전 대통령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라는 말이 그리도 고깝나"라고 비꼬았다.
네거티브 공세가 격화하며 퇴행적 대선이란 말까지 나오지만, 당분간 양당 주자들의 '노무현 전략'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 주자들은 지지자들에게 '고 김대중 전 대통령(DJ)-노 전 대통령-문 대통령'을 이을 계승자라는 걸 보여줘야 한다. 문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이 여전히 40%를 웃돌며 역대 대통령 중 임기 마지막 해 지지율 중 가장 높은 상황에서 친노·친문 표심의 영향력이 여전히 강하기 때문이다.
이재명 지사가 노 전 대통령의 정치적 동지이자 영남권 친노의 좌장으로 불리는 이강철 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을 영입하며 '노무현 정신'을 강조한 게 이를 뒷받침한다.
이준석 대표가 취임하면서 외연 확장을 자신의 과제로 꼽았던 만큼, 국민의힘도 노 전 대통령 이미지를 놓칠 수 없다. 이 대표는 취임 초기 경남 김해의 노 전 대통령 묘역을 참배하며 중도층 흡수에 공을 들였다. 그는 6월 25일 취임 이후 영남권을 처음 방문하면서 봉하마을을 찾았는데, 이때 "노 전 대통령의 가치를 우리 당의 가치로 삼겠다"고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