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소송에서 잇따라 패소하고 있다.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과 무관하게 개인 청구권을 인정하며 피해자 측 손을 들어줬지만, 최근 1심 법원에선 대법원 판단 취지를 무색하게 하는 판결이 이어지고 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25단독 박성인 부장판사는 11일 강제징용 피해자 A씨와 유족 등 5명이 미쓰비시 마테리아루(전 미쓰비시광업)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기각했다.
재판부는 피해자가 제때 소송을 제기하지 않은 점을 기각 이유로 들었다. 불법 행위에 대한 개인의 손해배상 청구권은 한일 청구권 협정 적용 대상이 아니라고 인정한 대법원 판결 시점이 소멸시효를 둘러싼 핵심 쟁점이었다. 일본 기업 측은 그동안 2012년 5월 유사한 소송에서 대법원이 승소 취지로 파기환송한 시점을 기준으로 시효를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피해자 A씨 등은 대법원 재상고심에서 손해배상이 확정된 2018년 10월 판결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반박했다.
재판부는 이에 대해 "2012년 대법원 파기환송 판결 때부터 피해자들이 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다"며 일본 기업 측 주장을 받아들였다. A씨 등은 2017년 소송을 제기했기 때문에, 2012년을 기준으로 삼을 경우 '3년 시효'가 지났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2012년 판결이 2018년 확정됐지만 대법원이 2012년 판시한 청구권 협정 내용에 관한 법리는 파기환송심과 재상고심에서 그대로 유지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다만 재판부는 대법원 판례를 따라 개인 청구권과 대한민국 재판 관할권은 모두 인정하면서 시효 완성만을 이유로 원고 패소 결정했다.
현재 서울중앙지법에선 강제징용 손해배상 소송이 20여건 진행 중이다. 법원 관계자는 “소멸시효는 사건마다 쟁점이 복잡해 이번 판결이 다른 재판에 영향을 준다고 보긴 어렵다”고 말했다. 다만 소멸시효를 쟁점으로 대법원에 계류 중인 사건이 있어 대법원에서 명확한 기준을 제시할 필요는 있어 보인다.
강제징용 피해자의 패소 판결은 6월에도 있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4부(부장 김양호)는 피해자와 유족이 일본제철ㆍ닛산화학ㆍ미쓰비시중공업 등 일본 기업 16곳을 상대로 낸 손배 소송에서 청구를 각하했다. 각하는 소송 내용에 대한 판단 없이 소송 요건이 안 된다고 판단해 재판을 끝내는 절차다. 당시 재판부는 “한일 청구권 협정은 개인에 대한 청구권까지 대상으로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며 사실상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단을 깨고 소송으로 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