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서울 종로구에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부인 김건희씨를 비방한 벽화가 등장했다. '쥴리의 남자들'이라는 제목이었다. 거센 비난을 받고 현재 벽화는 지워진 상태다. 격주 연재라, 좀 늦은 감이 있지만 이번에는 그 후진 벽화 이야기다.
결론부터 쓰고 시작한다. 하지 마시라. 어떤 정치인 남성을 공격하기 위해 그 배우자 여성을 성적으로 공격하는 것은 전형적 여성혐오다. 공격의 피해는 표적이 된 남성과 배우자뿐만 아니라 모든 여성이 당한다. 이는 특정 정치인이나 정당에 대한 지지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인 인권 차원의 문제다.
여성혐오가 일상 정치에 드러나는 흔한 패턴이 있다. 여기서 여성'혐오'란 단순히 '싫어한다(hate)'란 의미가 아니다. 여성을 남성과 같은 인간으로 여기지 않기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의미한다. 전문용어 '미소지니(Misogyny)'를 '여성혐오'로 번역하면서 생긴 오해는 지나치자. 인간을 차별하고 태어나기도 전에 성감별하여 죽이기까지 하는 데도 남존여비 '사상', 남아선호 '사상'이라고 대단한 사상인 양 부르고 있는 것이나 고쳤으면 좋겠다.
여성혐오가 정치에 이용되는 흔한 패턴이란 이렇다. 어떤 남성 인물을 공격할 때에는 그 남성과 친밀한 관계에 있는 여성을 공격한다. 특히 여성의 몸 자체나 성적인 이력을 집중적으로 비방한다. 남성은 이성을 지닌 인간이니 정신적 측면을 담당하고, 그의 배우자 여성처럼 그의 몸을 일상에서 접촉하고 있는 여성이 그의 육체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현실적 타격감은 실제로 존재하는 육체 쪽이 즉각적이니 이런 후진 공격의 역사가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프랑스 혁명 당시 앙시앵 레짐과 루이 16세에 대한 공격이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에게 집중되었던 것이 대표적 사례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스트리아 황제 마리아 테레지아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란츠 1세 부부의 막내딸로 1755년에 태어났다. 정략결혼으로 14세에 프랑스의 왕세자와 결혼한 후 1774년 남편 루이 16세의 즉위로 프랑스 왕비가 되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재판을 받고 1793년에 사형당했다. 미성숙한 인물임은 분명하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는 생존 당시는 물론 현재까지 실제 과오에 비해 지나치게 악의적으로 정치적 목적과 여성혐오를 위해 왜곡되어 이용되고 있다. 심지어 프랑스에서 머나먼 이곳 대한민국에서까지도.
마리 앙투아네트는 과소비를 즐기는 여성의 대명사가 되어 2000년대 즈음 '된장녀'를 공격할 때 이용되었다. 그런데 왕비의 사치와 낭비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고 하나 이는 실재(實在) 역사와 다르다.
소박한 성품의 남편 루이 16세와 달리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치품 구입이나 사적인 거처 꾸미기, 도박 빚 등으로 왕비 연금을 탕진하고 늘 왕에게 손을 벌렸다고 한다. 사실이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의 원인 중 하나였던 재정 위기가 그녀의 사치 때문만은 아니다. 당시 프랑스 정부의 지출은 늘 수입의 1.2배가 넘는 적자상태였지만 혁명 전해인 1788년의 궁정 경비는 프랑스 정부 총지출의 6%에 불과했다. 미국 독립 전쟁에 지원하는 등 전쟁과 외교 관련한 지출이 25%, 기존 국가 부채의 이자에 대한 지출이 50%였던 것에 비하면 왕비의 낭비는 프랑스 재정 위기의 전적인 원인이 아니었다. 도박빚으로 말하자면 왕비보다 왕의 동생 아르투아 백작(후에 샤를 10세가 된다) 쪽이 더 많았다.
또, 마리 앙투아네트는 빵을 달라고 요구하는 굶주린 민중들에게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어라!"라고 말했다고 하여 세상 물정 모르는 여성들을 비난할 때 호명되기도 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비판할 때도 국정보다 패션에 더 신경을 쓴다며 마리 앙투아네트에 비유되기도 했다. 2017년 탄핵 집회에 '말이 안통하네트'라는 피켓이 등장한 이유다.
그러나 마리 앙투아네트는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어라!(원문은 'lls n'ont pas de pain. Qu'ils mangent de la brioche'로 케이크가 아니라 '브리오슈'였다)"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왕비가 이 말을 하는 현장을 목격하고 기록한 사람은 없다. 분노한 민중의 습격으로 자신은 물론 자녀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한 마당에 여유롭게 그런 농담을 할 상황도 아니었다.
이 말은 1766년경 루소의 저작에 처음 등장한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로 시집 오기 전이다. 루이 14세의 왕비 마리 테레즈 도트리슈가 서민들이 빵이 없어 굶는다는 말을 듣고 동정하여 빵 껍질이라도 주라고 한 데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당시 혁명군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 말을 고의적으로 퍼뜨렸다. 결국 소문은 민중들의 증오를 불러일으켜서 마리 앙투아네트를 단두대로 끌고 갔다. 그리고 이 말은 현재까지도 미성숙하고 이기적인 존재로 여성을 비난하는 데에 이용되고 있다.
가장 끔찍한 여성혐오의 패턴은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성적 공격에서 볼 수 있다. 혁명 발발 이전부터 왕비를 다룬 포르노그래피 인쇄물들이 정치 팸플릿의 일종으로 나돌았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아르투아 백작과 루앙 추기경을 비롯한 주변 남자들은 물론 동성 친구인 랑발 공작부인, 폴리냑 백작부인과도 성관계를 하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이런 포르노그래피 팸플릿은 그녀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리하여 마리 앙투아네트는 아들과의 근친상간까지 추궁당한 끝에 루이 16세와 달리 정치범이 아니라 잡범으로 재판받고 사형당한다. 루이 16세는 정치적 범죄에만 답하면 되었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의 재정 적자를 일으킨 죄와 친정 오스트리아의 군대를 끌어들이려 한 반역죄뿐만 아니라 짓지도 않은 성적, 도덕적 범죄에까지 재판정에서 답변해야만 했다. 증거는 그녀의 실제 언행이 아니라 어처구니없게도 그동안 유포된 포르노그래피 팸플릿이었다.
그런데 성적인 공격을 담은 정치적 팸플릿은 마리 앙투아네트 이전에도 많이 있었다. 루이 15세 시절에는 왕의 정부인 마담 퐁파두르와 마담 뒤바리가 포르노그래피에 등장했다. 이렇게 왕의 주변 여성들을 공격하는 것으로 보아, 이런 포르노그래피의 목적은 군주제에 대한 공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절대왕정 시기였기에 왕에 대한 공격이 왕이 아니라 왕 주변의 여성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는 명백히 여성 혐오에 기반한다.
왕비와 몇몇 여성 혁명가들을 처형한 후 프랑스 정부는 여성의 정치적 참여를 배제하고 혁명 실패 원인을 반혁명 세력에 가담했던 여성들에게 돌린다. 그 결과 프랑스에서 여성 참정권은 1944년에야 주어진다. 유럽 내 다른 나라의 여성들이 제1차 세계대전 즈음에 참정권을 가졌던 사실과 비교하면 상당히 늦은 시기였다.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공격을 단순히 개인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프랑스의 여성 혐오 역사의 맥락에서 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마찬가지다. 지금 '쥴리의 남자들' 운운하며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배우자 김건희씨를 성적으로 공격하는 것 역시 여성 혐오다. 정치적 공격을 위해 해당 여성의 인권을 말살하고 오로지 여성을 목표 달성을 위한 도구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윤석열씨에 대한 공격과 지지 여부를 떠나서 전체 여성들의 인권 문제가 되므로 더는 이런 패턴이 확대 재생산되지 않게 막아야 한다.
한편, 흥미로운 지점이 보인다. 현재 김건희씨에게 집중된 공격은 윤석열씨를 대통령 후보에서 떨어뜨리는 것이 목적이다. 이상하다. 왜 대통령 후보를 낙선시키기 위해 배우자 여성의 과거 남성 이력을 지어내어 공격할까?
앞서 다른 젠더살롱 칼럼의 함무라비 법전 편에서 가부장제 사회에서 처자식은 남성의 재산이라고 쓴 적이 있다. 여성을 남성의 사유재산으로 여기는 성차별 사회에서는 성 경험이 많은 여성은 하자 있는 중고 물건이고, 하자 있는 여성을 차지한 남성은 남성 사회에서 서열 낮은 남성이다. 결국 '쥴리의 남자들'이란 벽화는 서열 낮은 남성을 우리의 최고 남성으로 모실 수 없다며 '얼레리꼴레리(알나리깔나리)' 놀리는 유치한 화장실 낙서인 셈이다. 벽화를 보고 '유쾌하다'며 즐거워하는 분들은 부끄러운 줄을 아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