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외교가 '자유주의 패권' 대신 '역외균형'으로 돌아온다면

입력
2021.08.13 04:30
18면
국제정치 현실주의 이론가 스티븐 월트 하버드대 교수
냉전 종식 후 30년간 지속돼 온 자유주의 패권 비판

미국과 중국의 관계 악화로 신냉전의 그림자가 드리우면서 한국 외교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미국은 한국의 오랜 동맹국이다. 중국과는 1992년 수교 이후 '전략적 동반자 관계'의 지위를 유지해 왔다. 하지만 이 같은 미중 대립 구도 속에 한국의 균형 외교는 지속될 수 있을까. 특히 도널드 트럼프 시대의 소란 이후 변화를 도모하고 있는 조 바이든 미 행정부의 외교를 심도 있게 논의할 필요가 있다. 한미관계의 발전적 구축을 위해서는 미국의 외교정책 방향성에 대한 이해가 필수다.

때마침 미국의 국제정치 현실주의 이론가 스티븐 월트 미 하버드대 교수의 '미국 외교의 대전략'이 번역 출간됐다. 1991년 옛 소련 붕괴에 따른 냉전 종식 이후 미국 외교 노선의 흐름을 짚은 책이다. 트럼프 정부가 출현한 2016년까지 미국 외교정책의 전개와 이에 대한 비판적 평가, 그리고 더 나은 전략 제안을 담았다.

월트 교수는 존 미어샤이머 시카고대 교수와 더불어 국가 간 관계에서 힘의 논리를 중시하는 미국의 대표적 현실주의자이자, 논쟁적 학자다. 그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임 중이던 2018년에 내놓은 이 책에서 지난 30년간 이어져 온 미국의 외교정책인 '자유주의 패권(liberal hegemony)'을 명백한 실패로 규정했다. 이에 대해 그가 성역화된 이상주의적 정책을 과감히 비판했다는 찬사도 있지만 그 실패의 원인을 자국 내 정치체제에서 찾은 탓에 반박 의견도 만만치 않다.

책에 따르면 냉전 이후 세계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된 미국은 미국이 지향하는 모습대로 세계의 많은 지역을 개조하려 했다. 세계가 자유민주주의 국가들로만 이뤄진다면 더 평화롭고 번영할 것이라는 믿음하에 군사적 수단까지 동원했다. 하지만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동유럽으로 확장하면서 러시아와의 관계가 악화됐다. 아프가니스탄·이라크를 침공하고 리비아 등의 내정에 개입하면서 수조 달러를 썼으나 성과가 없었다. 그사이 중국은 미국이 만든 글로벌 경제에 편입되면서 경제 성장을 거듭해 강력한 패권 도전국으로 떠올랐다.

저자는 미국이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는" 자유주의 패권 전략을 고수한 이유를 외교안보 분야 기득권층의 확고한 의지에서 찾았다. 그는 버락 오바마 정부 국가안보 부보좌관을 지낸 벤 로즈가 써 논란이 된 '블롭(Blob)'이라는 표현까지 동원했다. 로즈는 외교정책 기득권층을 블롭, 즉 한 방울의 물과 같다고 경멸적으로 지칭했다. 블롭을 구성하는 싱크탱크, 언론인, 재단, 특정 개인들은 자유주의 패권이 세계를 위한 올바른 전략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고, 동시에 자유주의 패권은 이들의 권력과 지위를 보장해 줬다. 저자는 그들의 의도 자체는 최선이었지만 다른 국가와 미국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책의 원제도 '선의가 낳은 지옥(The Hell of Good Intentions)'이다.

저자는 이 같은 분석을 토대로 자유주의 패권 전략을 폐기하고 '역외균형(offshore balancing)' 전략으로 돌아가자고 제안한다. 역내 동맹국을 활용하고 미국에 직접적 위협이 되는 상황에서만 개입하는 역외균형 전략은 수십 년 동안 미국 외교정책의 기본 논리였지만 냉전 종식과 함께 버려졌다.

책은 미국 외교의 큰 전략에 관한 다양한 시각 중 현실주의자의 제한적 입장을 담고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자유주의적 국제질서를 표방하는 바이든 행정부 외교안보팀도 월트 교수를 비롯한 현실주의자들의 비판 목소리를 의식하는 모양새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카네기국제평화재단 선임연구원이던 2019년 초 미어샤이머·월트 교수의 현실주의 외교관(觀)을 반박하는 기고문에서 "(미어샤이머·월트 교수의 주장은)군사력 사용을 줄이고 있는 외교정책 그룹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했다"고 적었다. 최근에는 바이든 대통령의 아프가니스탄 미군 철수 결정을 놓고 미국 외교정책이 현실주의로 복귀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그렇다면 미국 외교의 변화는 한국에 기회일까, 도전일까.

월트 교수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중국의 부상으로 미국 외교안보의 현실주의적 전환 요구가 커지고 있고, 한국과 미국 간 안보 파트너십의 가치는 더욱더 높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물론 한국이 그 기회를 잡을 전략적 안목과 민첩성이 있느냐는 별도의 문제다.


김소연 기자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