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술사와 미술학으로 각각 박사학위를 받은 나름대로 이 분야의 전문가다. 그런데 문화재로 논문을 쓰다 보면, 유독 '물건을 직접 봤는지'를 묻는 분이 있다. 여기에 담긴 뜻은 흥미롭게도 '안 봤으면 글을 쓰지 말라'는 모종의 압박이다.
연구자에게 유물을 직접 대하는 일은 무척 중요하다. 그러나 일본에 있는 고려 불화를 예로 들면, 승인까지 1년은 족히 걸릴 때도 있다. 즉 접근이 쉽지 않은 경우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몇몇 분들은 특정 유물의 사진이나 접근권 자체를 무기화하곤 한다. 즉 기울어진 운동장인 셈이다. 관점과 해석으로 연구되어야 할 학문 영역을 자료의 접근으로 이해하는 볼썽사나운 꼰대가 아닐 수 없다.
3차 산업 시대에서, 자료는 폐쇄적인 소유에서 공유의 개념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4차 산업과 함께 이러한 양상은 더욱 두드러지는 모양새다. 이제 '소유에 의한 차등'은 사라지고, 공유라는 평등 위에서 오직 창의력으로만 경쟁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지식의 폐쇄적인 독점은 극심했다. 붓다 이전 인도의 지식인들은 스승과 제자가 무릎과 무릎을 맞댄 채 비밀리에 지식을 전수했다. 이를 우파니샤드라고 한다. 즉 철저하게 선택된 사람들만의 교육인 것이다.
이는 중국도 마찬가지다. 공자 이전의 교육은 국가가 관리하는 관학(官學) 일색이었다. 이를 사학으로 전환한 최초의 인물이 바로 공자다. 즉 공자는 원하든 원치 않든, 사학의 첫 시원을 연 경쟁자 없는 '일타강사'였던 셈이다.
공자는 '논어' '위령공'에서 "가르침에 있어서는 차등이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논어' '술이'에서는 "육포 한 묶음 이상을 가져오면, 일찍이 가르쳐 주지 않은 적이 없었다"라고 하여, 사학으로서의 비용에 대한 부분도 엄격히 하고 있다. 진짜 명실상부한 동아시아 사학의 시조가 아닌가?! 그래서 나는 '강남의 학원가에 공자 동상이라도 세워야 하는 것 아니냐'는 농담을 하곤 한다.
붓다 역시 '장아함' '유행경'에서, 당신에게는 감추고 가르쳐 주지 않는 '쥔 주먹은 없다'고 천명한다. 또 붓다의 가르침을 당시 고급언어인 산스크리트어로 통일하자는 건의가 들어오자,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분명한 선을 긋는다. 산스크리트어의 통일이란, 유럽에서 '성서'의 권위는 라틴어만이 가진다는 루터 이전의 관점과 유사한 생각이다. 그러나 붓다는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이로 인해 불교 경전은 초기부터 다양한 언어의 흐름을 보이게 된다.
붓다에게 있어서 지식을 통한 자유는 모두에게 반드시 열려 있어야만 하는 인간의 보편적 권리였다. 그리고 그 끝에 깨침이라는 영원한 행복이 위치해 있다. 인간을 위한 학문과 행복을 위한 깨침, 이것이 바로 불교인 것이다.
붓다의 연대는 공자보다 빠르다. 이런 점에서, 붓다는 열린 교육을 제창한 가장 빠른 선각자라고 하겠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이것이 전달되지 못하는 부분이 있으니, 개탄스러울 따름이다.
4차 산업 시대의 지식인이란, 많이 암기하고 다양한 자료를 갖추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창의력에 의해서 새롭게 재단하고, 신선한 관점으로 재해석하는 사람일 뿐이다.
자료의 충실한 분석은 인공지능으로도 충분히 대체되는 시대가 도래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붓다가 인류에 제기한 열린 교육의 문제는 인류 문명의 진정한 빛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이란, 반드시 인간 행복을 정조준하고 있어야 한다고 붓다는 역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