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를 사지 않을 권리] <17>압착 뚜껑 유리병
분리배출 고수라고 해도 쉽지 않은 미션이다. 유리병에 단단히 붙은 플라스틱 뚜껑을 대체 어떻게 떼어내야 할까.
유리는 재활용이 용이한 재질이지만, 용광로에서 녹일 때 비닐이나 플라스틱이 붙어 있으면 촛농 형태의 잔탄으로 남기 때문에 꼭 떼어서 배출해야 한다.
그러나 참기름, 굴소스 용기 등은 유리병에 떼기 힘든 압착 뚜껑이 달려 분리배출을 어렵게 한다. 한국일보 기후대응팀은 칼, 니퍼, 실톱 등을 이용해 압착 뚜껑 떼기에 도전해봤다. 온갖 실패를 겪다 보면, 왜 쉽게 돌려서 뗄 수 있는 뚜껑을 쓰지 않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기업들은 "내용물의 향을 보존하기 위해서 뚜껑을 병에 압착시켜야 한다"는 이유를 대고 있다. 그러나 같은 내용물을 담으면서도 이런 뚜껑을 쓰지 않는 제품도 많아서 이 같은 설명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런 유리병들에는 ‘재활용 어려움’ 표시가 돼 있다. 환경부가 부여한 등급이다. 그러나 등급만 표시하면 될 뿐, 어떤 제재도 받지 않는다.
한국일보는 5개 제품을 골랐다. 오뚜기의 '고소한 참기름', CJ제일제당(백설)의 '진한 참기름', 대상 청정원의 '파마늘 기름'과 '프리미엄 굴소스', 샘표식품의 '국시 장국'이다. 모두 손으로는 마개를 분리할 수 없어 재활용에 지장을 주는 유리병 제품이다.
어떻게든 분리배출 방법을 찾아봤다. 우선 커터칼이나 가위로는 뚜껑에 흠집도 나지 않았다. 잘못했다가는 손에 상처를 입을 수 있는 위험한 방법이기도 했다. 결국 니퍼와 펜치, 실톱과 같은 공구를 써야 했다.
청정원의 굴소스 마개를 니퍼로 제거하는 도중 병 입구가 깨졌다. 뚜껑을 자르다가 유리병 입구도 함께 잘린 것이다. 뚜껑이 잘 잘리지도 않을뿐더러, 병과 뚜껑이 겹쳐있던 탓이다. 깨진 유리병은 재활용 업체 직원들이 다칠 위험이 있어 신문지 등으로 감싸 일반쓰레기로 배출해야 한다. 뚜껑은 실톱을 이용해 도려낸 뒤에야 겨우 분리할 수 있었다.
CJ제일제당의 백설 참기름은 병을 깨뜨리지 않고 뚜껑을 분리했지만,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뚜껑이 단단해 실톱이 들지 않아 니퍼로 잘랐다. 그마저도 병에 가장 강하게 압착된 중간부분엔 니퍼 날이 잘 들어가지 않아 손에 힘을 잔뜩 주어야 했다.
분리하기는 했다고 해도, 이게 보통 가정에서 쉽게 할 수 있는 일인가 회의가 들었다. 분리배출을 위해 실톱이나 니퍼를 구비하고 매번 힘들여 자르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소비자에게 지나치게 많은 노력이 요구된다.
일반적으로 분리배출된 유리병은 잘게 파쇄한 뒤, 녹여서 다시 유리병으로 만들거나 콘크리트의 원료로 재활용한다. 다만 주류ㆍ음료수ㆍ생수 등 '빈 용기 보증금제' 적용 대상 병은 살균·세척 과정을 거쳐 '재사용'된다. 압착 플라스틱 마개를 사용하는 기름병·소스병은 모두 재활용 대상이다.
이런 참기름병 등이 소비자가 떼기는 어려워도 공정과정에서 쉽게 분리할 수 있다면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중삼중 공정을 거쳐 뚜껑을 분리해낼 수 있는 시설을 갖춘 업체는 절반도 안 된다. 시설과 인력이 부족한 영세 업체들은 이런 용기들을 아예 일반쓰레기로 폐기한다.
플라스틱 뚜껑이 달린 유리병을 공정과정에서 분리하는 과정은 이렇다. 우선 유리병을 잘게 파쇄한다. 이 과정에서 뚜껑이 떨어져 나온다. 이후 '광학선별기'를 이용해 자동으로 플라스틱과 유리를 분리한다. 광학선별기는 빛의 파장을 이용해 폐기물을 재질별로 분류해주는 기계다.
그러나 이런 시설을 갖춘 업체는 약 40%에 불과하다. 한국순환자원유통지원센터(KORA) 자료(2017년 기준)에 따르면, 유리병 취급 업체 약 150곳 중 전문적인 선별 시설을 갖춘 곳은 60여 곳이었다. 나머지 업체에서는 파쇄된 유리 조각 더미에서 노동자가 일일이 손으로 플라스틱을 빼내야 하는데, 위험할 뿐만 아니라 비용도 만만찮다.
폐기물 선별업체 녹색사람들의 채복희 대표는 “뚜껑이 분리되지도 않고 내부에 이물질이 많은 탓에 재활용 업체에서 받질 않는다”며 "대부분을 일반쓰레기로 폐기한다"고 말했다. 인천의 또 다른 유리병 업체 대표도 “유리병을 파쇄한 뒤 뚜껑을 손으로 건지는 방법이 있지만 인건비 탓에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KORA 자료에 따르면, 선별 과정에서 누실되는 유리병은 전체 분리배출량의 약 9.4%에 달한다. 2011~2015년 연평균 41만9,000톤의 유리병이 출고되어 약 36만8,720톤(약 88%)이 분리배출됐는데 이 중 3만4,845톤(9.4%)이 선별 과정에서 유실됐다. 다만 여기엔 재질을 혼동해 잘못 배출한 화장품 용기 등도 포함돼있다.
업체들은 유리병과 병 뚜껑이 밀착돼야 내용물의 향이 보존되기 때문에 참기름류 등의 플라스틱 뚜껑을 압착시켜 사용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CJ제일제당 관계자는 “제품의 향과 같은 품질 보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사용하고 있지만 분리가 가능한 뚜껑을 개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상 청정원 관계자도 “내용물이 흘러 내리지 않게 하고 품질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한다”고 말했다. 샘표 관계자는 “일부 품질 보존을 위해 필요한 제품에 한해 사용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런 해명들은 선뜻 납득하기 어렵다. 참기름의 경우 코르크 마개를 사용하거나 비닐팩에 담아 판매하는 업체도 있다. 또 청정원은 굴소스 등에 압착 마개를 사용하지만, CJ제일제당은 철 뚜껑을 사용한다. 샘표는 "국물요리 육수 제품에 압착 마개를 써야 품질 유지가 된다"고 설명했지만, 철 뚜껑만 사용하는 업체도 많다.
코르크 마개를 사용하는 참기름 제조업체 대표는 “분리 가능한 뚜껑을 사용하더라도 참기름 품질이 떨어졌다는 등의 항의를 받은 적은 없다”며 “코르크 마개가 플라스틱 뚜껑보다 비싸서 대기업에서 사용을 꺼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다만 참기름병에 압착 뚜껑을 사용하는 업체 중 오뚜기는 "압착 뚜껑을 사용하는 데 특별한 목적은 없었다"며 "재활용 어려움 등급을 우수 등급으로 상향하기 위해 뚜껑 개선을 진행 중이며 올해 안으로 분리 가능한 뚜껑으로 개선해서 모든 제품에 적용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환경부도 업체의 개선을 유도하는 정책을 마련했지만 기준만 있을 뿐 별다른 제재수단이 없어 실효성이 떨어진다.
환경부는 지난해 12월 환경부 고시인 ‘포장재 재활용 용이성 등급평가 기준’을 마련해 올해부터 시행하고 있다. 재질별로 얼마나 재활용이 잘되는지 평가 기준을 마련한 뒤, ‘어려움’ ‘보통’ ‘우수’ 등 등급을 매긴다.
그러나 ‘어려움’ 등급을 받더라도 포장재에 작게 표기하는 것 외에 어떠한 제재도 받지 않는다. 이마저도 업체가 연기 신청을 하면 12월까지 표시가 유예된다. 실제 백설 참기름, 청정원의 파마늘 기름과 굴소스에는 ‘재활용 어려움’ 표시가 있었지만 오뚜기와 샘표식품 제품엔 이런 표시가 없다.
환경부에 따르면 지난 5일까지 등급평가 검사를 받은 제품 중 약 40.5%(2만1,448개)가 어려움 등급을 받았다.
일부 품목을 제외하고는 '어려움' 등급을 받아도 별다른 불이익이 없다는 것은 등급 제도의 큰 맹점이다. 멸균팩·와인병·위스키병은 '어려움' 표시를 면제해주는 대신 생산자책임재활용제도(EPR) 분담금을 20% 할증하고 있으며, 페트병은 '어려움' 표기를 하고 분담금도 20% 할증한다.
대부분 제재를 안 받다보니 포장을 개선하려는 노력도 더딜 수밖에 없다. 어려움 등급을 받은 제품 중 포장을 개선해 다시 등급을 신청한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는 파악된 바 없다.
환경부 관계자는 “EPR 분담금 할증 적용 대상 포장재를 확대하기 위해 할증률 산정을 위한 연구용역을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