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가요계에 신선한 충격을 선사했던 '사이버가수' 아담을 기억하는가. 1998년 1월 정식 데뷔했던 아담은 3D 그래픽으로 구현된 가상인간으로, 당시로는 상상할 수 없었던 파격적인 시도로 큰 화제를 모았던 주인공이다.
물론 과거의 기술력에는 한계가 있었던 탓에 '가상 인간'이라기보단 3D 만화 주인공 같은 느낌이 강한 모습이었지만, 아담의 인기는 꽤나 굵직한 성과를 남겼다. 첫 앨범은 무려 2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고, 실제 팬클럽이 존재한 것은 물론 그의 모습을 담은 각종 MD들도 인기리에 판매되곤 했다.
그러나 아담은 2집의 실패 이후 '컴퓨터 바이러스로 인한 사망설' '군입대설' 등을 남기고 조용히 사라졌다. 투입되는 비용 만큼 인기나 창출되는 수익 등이 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시절 '178cm의 키, 68kg의 몸무게를 가진 조각 같은 외모의 20살 사이버가수'라는 꽤나 구체적인 프로필과 세계관을 무기로 등장했던 아담은 가상인간의 발전 가능성을 시사하는 계기였다.
그리고 약 20여 년이 지난 지금, 국내 연예계에는 다시금 가상인간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그 사이 눈에 띄게 발전한 인공지능(AI) 기술력과 이젠 우리의 생활 속에 스며든 메타버스(3차원 가상 세계) 등은 가상인간 진화의 바탕이 됐다.
최근 SNS를 시작으로 다수의 광고, 화보까지 접수하며 뜨거운 관심의 중심에 서 있는 로지는 현재 AI 기반 가상 인간 기술의 현주소와 이러한 기술력이 향후 연예계에 미칠 파급력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드는 가장 대표적인 예다.
현재 무려 4만6,000여 명의 SNS 팔로워를 보유하고 있는 로지의 정식 타이틀은 '버추얼 인플루언서'다. MZ 세대가 가장 선호하는 얼굴 생김새와 800여 개에 달하는 표정들, 몸 대역을 통해 촬영된 신체를 3D 모델링 기술을 통해 조합해 만든 가상인간인 그는 자신만의 개성과 세계관을 필두로 SNS 상에서 인플루언서로 자리매김했다. '패션에 관심이 많은 ENFP 유형의 가상인간으로, 현재 나이 22살에서 영원히 나이가 들지 않는 인물'이라는 세계관은 로지를 설명한다. 가상 인간이라는 특징을 활용해 코로나19 시국에서도 세계 곳곳을 누비고, 실제로는 방문하기 어려운 곳들에서 '인증샷'을 찍어 수시로 SNS에 게재하는 그에게는 팬들의 뜨거운 반응이 따라 붙는다.
그가 출연한 TV 광고를 향한 반응 역시 심상치 않다. 지난달 1일 공개된 로지의 한 광고 영상은 현재 유튜브 조회 수 2천만 뷰를 돌파한 상태다. 이전까지 SNS나 화보를 중심으로 MZ 세대에게 얼굴을 알렸던 로지는 해당 광고에서 화려한 춤 실력과 독특한 비주얼로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으며 단숨에 'A급 인플루언서'로 발돋움 했다. 눈여겨 볼 점은 로지의 광고가 천만 뷰를 돌파한 시점에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가 가상 인간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사실이다. 이후 로지의 존재가 화제를 모으면서 그가 실존하는 인간이 아닌 3D 기술로 구현된 가상 인간이라는 사실이 알려졌고,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과 신선함을 동시에 선사했다.
그러나 가상 인간이라는 사실이 공공연하게 밝혀지기 시작한 뒤에도 그로 인한 리스크는 거의 없었다. 이미 각종 콘텐츠 등을 통해 메타버스 세계관에 익숙해진 MZ 세대는 로지의 존재를 이질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한 명의 신선한 인플루언서로 인식했고 로지는 점차 활동 영역을 넓혔다. 현재 로지는 첫 TV 광고를 비롯해 자동차·식품 광고 등에도 출연하며 활약 중이며, 유명 패션 잡지에도 당당히 '모델'로서 모습을 드러내는 중이다. 이 외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MZ 세대의 떠오르는 아이콘인 로지에게 끊임없는 러브콜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는 가운데, 그가 벌어들일 수익은 실로 상당할 전망이다.
로지의 성공 이후 그를 개발한 싸이더스 엑스는 올해 말께 3인조 남성 가상인간 아이돌 그룹도 데뷔시킬 계획임을 밝힌 상태다. 이 외에도 다양한 회사에서 AI 기반 인간 인플루언서, 아이돌 그룹 등을 선보이며 AI 가상 인간 시장은 점차 확대될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이들을 향한 MZ 세대의 반응 역시 로지 못지 않게 뜨거운 상태다.
가요계에서도 AI를 활용한 콘셉트는 이미 본격화 됐다. 제대로 스타트를 끊은 건 지난해 데뷔한 그룹 에스파(aespa)다. "미래 세상은 셀러브리티와 A.I.의 세상이 될 것"이라는 SM 이수만 총괄 프로듀서의 소개와 함께 포문을 연 SMCU(SM Culture Universe)의 첫 주자로 나선 에스파는 가상 현실에 존재하는 아바타 멤버인 '아이'와 싱크를 통해 소통한다는 파격적인 미래지향적 콘셉트를 내세웠다.
이들은 AI 기술로 구현된 아바타 멤버인 '아이'와 자신들의 연결을 방해하고 세상을 혼란에 빠뜨린 '블랙맘바'를 찾기 위해 '광야(KWANGYA)'로 떠난다는 세계관을 기반으로 데뷔 이후 활동을 이어오는 중이다. 실제 '아이'들은 이들의 뮤직비디오는 물론, 음악 방송 무대에서도 종종 등장하며 에스파의 세계관을 공고하게 만든다. 에스파의 경우, 데뷔 당시 AI 아바타를 두고 다양한 의견들이 쏟아졌지만 '아이'를 활용해 세계관을 쌓아가면서 이들을 둘러싼 우려의 시선을 지워 나가고 있다.
진화한 기술력과 탄탄한 세계관, 활발한 소통 행보를 통해 대중의 편견을 무너뜨린 AI기반 가상 인간의 장점은 확실하다. 실존하는 스타들은 스케줄 상의 이유나, 공간 이동의 제약 등으로 쉽게 소화할 수 없는 스케줄도 얼마든지 소화 가능하며 변화하는 대중의 니즈를 빠르게 수용해 '호감형 인플루언서'로서 오랜 시간 영향력을 이어갈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사생활 잡음 등이 발생하지 않는 점 역시 광고주들의 입장에서는 매력적인 지점이다.
급변하는 디지털 기술의 발전과 점차 몸집을 불려 나가고 있는 메타버스 시장 속에서 '가상 인간'의 존재감은 날로 커지고 있다. 광고나 화보계까지 접수한 이들의 가파른 성장세는 향후 이들이 현재 연예계를 이끌고 있는 스타들 못지 않은 입지로 성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까지 시사하고 있다. 물론 이들이 보다 대중적인 유명세와 영향력을 갖춘 스타로 성장하기까지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지만, 분명한 것은 '가상 인간'들이 불러오는 새 바람의 세기가 심상치 않다는 사실이다. '아담' 이후 20여 년의 시간을 지나 다시금 찾아온 가상 인간들이 연예계의 지각 변동을 일으키는 주인공이 될 지 지켜봄 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