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정치가가 있기는 한 건가

입력
2021.08.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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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투쟁만 있었다. 일반 시민들의 삶을 개선하는 일은 뒷전이었다. 평등과 재분배, 복지와 사회 통합 의제의 진전은 없었다.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졌다. 불평등은 심화되었다. 분단과 전쟁, 권위주의 산업화의 시기 동안 가족과 공동체를 위해 헌신했던 나이 든 시민들이 빈곤, 고독사, 자살로 내몰려도 몰라라 했다.

계급투쟁도 아니고, 진보나 보수의 싸움도 아니었다. 정당의 이념과 정견을 둘러싼 싸움도 아니었다. 서울대 법대 출신 사이의 싸움이었고, 법률 엘리트들끼리 치고받은 싸움이었다. 그들의 권력 투쟁에 한국 사회가 한바탕 놀아난 느낌이다. 그것의 이면은 대통령 싸움이었다. 대통령이 된 사람,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이 벌인 싸움이었다.

이런 종류의 싸움은 사람이 바뀌어도 멈출 줄 모른다. 본격 대선 국면에 들어섰지만 그 격렬함이 약해질 리 없다. 앞선 대통령들의 운명에서 보듯, 이 싸움에서 패자는 곧 파멸이다. 우리 사회의 모든 추한 열정이 이 싸움에 끌어들여지는 이유다. 추문과 욕설은 기본이다. 비난과 추궁은 정치언어보다 공안담론에 가깝다.

어떤 경제, 어떤 사회, 어떤 교육, 어떤 복지가 필요한지에 대한 정책적 고민은 느낄 수 없다. 그런 건 쓸데없다. 세간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상대를 무너뜨릴 ‘지라시’가 낫다. ‘멘트’를 날려야 한다. ‘메시지’도 올려야 한다. 오랜 준비가 필요한 정책 대안? 진지한 분석과 논의 정립? 그런 건 20세기 정치다. 멘트가 날아가고 메시지가 올라오면 정책은 그에 맞춰 조어(造語)하면 된다. SNS 시대 정치는 이렇게 하는 거다. 청와대가 먼저 여론 관리 기구처럼 일하더니, 이제는 정당도 의원실도 정치인도 연예기획사나 선거기획 회사처럼 일한다. 여론정치의 극대화다.

권력 투쟁에 동반된 증오와 적대의 말은 시민 일상을 파괴했다. 정치 이야기는 절반이 야유나 욕설이다. 대통령 이야기가 오래된 인간관계도 찢어놓았다. 증오는 혐오를, 적대는 저주를 낳았다. ‘페미’와 ‘이대남’ 같은 악마화 논쟁이 공론장을 지배했다. SNS 반응을 즐겨 기사화하는 기자들이 정치 저질화에 큰 역할을 했다. 대선 후보는 많아도 정치 지도자감은 없다. 뭔가 말을 하고 설명을 하는데, 귀를 거쳐 마음까지 오는 내용은 없다. 지친다.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 왜 이런 정치가 아닌 다른 정치를 말하는 사람은 없는 걸까?

혹자는 이 모든 게 열렬 지지자들 때문이라며 자신의 경험을 말한다. 그들 생각과 조금만 다르게 말하면 공격이 쏟아진다. 일상의 업무를 볼 수 없을 정도다. 어쩔 수 없이 맞춰가게 된단다. 정치가가 자유롭게 말할 수 없는 시대? 박정희, 전두환 시절에도 정치가의 말은 막을 수 없었다. “목을 비틀어도” 말을 했다. 지지자들의 독단에 침묵하는 지금 정치인들이 그때 정치를 했다면 자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더 굴종적일 게 뻔하다. 민주주의 시대인데도 정치가의 역할은 없다.

민주주의란 정치적 평등(political equality)의 원리로 작동한다. 1원1표의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불평등 효과를 1인1표의 정치로 제어해 가는 데 민주주의의 가치가 있다. 정치가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개선하기보다 권력 싸움만 하면, 민주주의는 허상이자 껍데기가 된다. 지금 우리는 그런 허상을 붙잡고 또 법대 엘리트들에게 놀아나고 있는지 모른다.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국회미래연구원 초빙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