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는 9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가석방에 침묵했지만, 법무부의 가석방 결정엔 청와대의 의중이 실려 있다고 봐야 한다. 청와대가 반대했다면 법무부가 가석방을 결정하지 못했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재벌 특혜는 없다’는 원칙과 ‘임기말 경제 성과’라는 현실 사이에서 고심해 왔다. 이에 특별사면이 아닌 가석방으로 절충점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까지 원칙을 고수했다. 올해 들어 이 부회장을 풀어 주는 쪽으로 조금씩 입장을 바꿨다. 지난 6월 삼성전자ㆍ현대차ㆍSKㆍLG 등 4대그룹 대표 초청 간담회에서 이 부회장을 특별사면해야 한다는 재계 요구에 대해 “국민들도 공감하는 분이 많다”고 가능성을 활짝 연 것이 '징후'였다. 5월엔 “(사면은) 결코 대통령이 마음대로 결정할 사안이라 생각하지 않는다"며 강경한 태도를 보였었다.
이 부회장 가석방에 우호적인 여론도 청와대의 부담을 덜어줬다. 최근 각종 여론조사에서 이 부회장 사면에 찬성하는 응답은 60~70%대를 기록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 부회장 가석방에 찬성하는 국민이 다수인 상황이라 청와대의 '정치적' 판단이 가능해졌다"고 했다.
이 부회장 가석방으로 여론에 호응하면서 경제적 실리를 챙기겠다는 게 문 대통령 판단으로 보인다. 재계는 보다 적극적으로 투자하는 제스처를 통해 정부 결정에 화답할 가능성이 크다. 정부 관계자는 “삼성의 추가 투자를 원하는 조 바이든 미국 정부도 여러 경로로 이 부회장 가석방에 관심을 표해온 것으로 안다”고 했다.
코로나19 백신 수급이 최근 난항을 겪는 것이 이 부회장에게 '호재'로 작용한 측면도 있다. 모더나가 백신 수출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삼성바오로직스가 국내 모더나 백신을 위탁 생산한다는 점을 정부가 지렛대로 활용하려 할 수 있다. 청와대는 이 부회장이 '백신 특사' 역할에 나서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문 대통령이 이 부회장 가석방을 홀가분하게 허락한 것은 아니다. 문 대통령은 지난 대선 때 ‘뇌물ㆍ배임ㆍ횡령 등 5대 중대 부패 범죄에 대한 대통령의 사면권을 제한하겠다'고 공약했다. 법리적으로는 가석방과 특별사면이 다르지만, ‘재벌 특혜’로 비치기는 마찬가지다. ‘반칙과 특권을 없애겠다’는 문 대통령의 약속은 상당 부분 허물어졌다.
청와대는 9일 입을 굳게 닫았다. 이 부회장 가석방을 법무부의 독자적 판단으로 마무리하기 위해서다. 국정농단 사태에 연루된 이 부회장을 풀어 준 것이 문재인 정부 정체성을 훼손한다는 비판, 재벌 사면·가석방의 경제 효과가 입증되지 않았다는 지적을 청와대는 부담스러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