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성남시와 시의회가 6월 조례로 '광주대단지 사건' 명칭을 '8·10 성남(광주대단지) 민권운동'으로 개정했다. 발발 50년 만에 개발독재시대의 사회인권운동의 주요 분수령이던 사건이 '난동-폭동'의 오명을 씻어냈다.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은 수도권 등의 산업 인력 확보를 위해 농촌 인구의 도시 이주를 부추겼다. 저곡가 이농 정책은 농촌의 희생으로 공업·수출 주도 근대화를 추진하겠다는 권위주의 성장모델의 핵심이었다. 1960·70년대 이농 인구는 한 해 평균 60만 명에 달했고, 그들은 저임금 노동자로, 도시 빈민으로 서울 곳곳에 판자촌을 형성했다. 서울시는 1968년 서울 위성도시로 '광주대단지'를 조성해 판자촌 주민들을 이주시킨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당시 서울시 무허가 주택은 약 23만여 호나 됐다.
정부와 서울시는 입주 3년 뒤부터 분할상환하는 조건으로 평당 2,000원에 가구당 20평씩 토지를 분양하고 인근에 공장을 지어 취업도 도모한다는 약속으로 10만여 명을 이주시켰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한 곳은 상수도나 도로, 화장실도 없는 허허벌판 천막촌이었다. 당연히 공장도 없었다. 막노동이라도 하려면 하루 6번 서울을 오가는 버스를 이용해야 했다.
그 와중에 투기 수요가 유입됐다. 철거 정착민이 헐값에 '딱지'를 파는 사례가 늘어나자 빈민 재유입을 경계한 당국은 1971년 6월, 당초 약속한 금액보다 최대 10배(평당 1만 6,000원)에 달하는 토지대금을 7월 말까지 일시불로 납부하라는 고지서와 함께, 미납 시 벌금을 부과한다고 통보했다.
대책위를 결성한 시민들은 8월 10일 서울시장 면담마저 불발되자 경기 성남출장소를 점거해 방화하고 관용 차량을 탈취해 진압 경찰과 대치했다. 내무부와 서울시는 당일 현장에서 주민들의 요구(분양가 인하및 분할상환, 취로사업 시행)를 전면 수용하고 '대단지'의 성남시 승격을 발표하면서 사태를 수습했다. 하지만 주민 20명이 구속됐고 '광주 대단지'와 '성남'은 슬럼과 폭도의 도시라는 오명을 써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