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은의 야구민국] 이성열 유신고 감독의 야구 인생

입력
2021.08.09 05:10
아마 야구 감독 BIG 3 첫번째, 이성열 수원 유신고 감독 
먹여주고 재워준다는 말에 지방에서 서울로 야구 유학 
1988년, 영남 출신으로 호남지역 야구부 감독 역임 
"야구에 매달려 산 인생... 아내에게 고맙고 미안"




대통령, 장군, 그리고 야구 감독. 남자라면 꼭 한번 해볼 만한 직업으로 일컬어진다. 그중에서 야구 감독은 사연도 많고 힘든 만큼 보람도 느낄 수 있는 자리로 손꼽힌다. 가장 다이내믹한 직업 중의 하나다.

이성열(66) 유신고 감독은 1979년에 감독 생활을 시작한 이후 몸이 아파서 쉰 1년과 심판위원으로 지낸 1년을 제외하면 감독 생활만 40년을 했다.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다. 야구와 관련된 그의 삶을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야구 때문에 고향이 바뀐 사람"이다. 대구에서 태어나 청소년기를 온전히 대구에서 보냈지만 누가 고향을 물으면 "광주"라고 대답한다. 실제로 평소의 말에도 전라도 억양이 묻어난다. "야구와 결혼한 남자"라는 이야기도 있다. 흔해 빠진 수식이 아니다. 그의 아내는 "야구에 미쳐서 잊을 만하면 집에 들어왔는데, 심지어 하도 집에 안 들어와서 실종 신고를 하러 경찰서에 간 적도 있었다"면서 "나하고 결혼했는지 야구하고 결혼했는지 헷갈리게 만든 사람"이라고 회고했다.

스승 그 이상의 스승, 김인식 감독

이 감독은 6.25가 끝난 지 채 만 2년이 지나지 않은 1955년 5월4일 6형제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타고난 강골이었다. 넘치는 에너지와 지고는 못 사는 성격에 한시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감독 혹은 선배에게 얼차례 당한 기억은 있지만 싸움에서 맞거나 진 적은 없다. 이 감독은 나보다 싸움 많이 해본 사람, 나만큼 싸움 잘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그가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로 유학을 떠난다고 하자 대구에서 싸움 좀 한다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제 좀 살겠네. 서울 가거든 거기서 자리 잡고 다시는 고향에 내려오지 말아라."

이 감독이 서울로 떠난 것은 야구 때문이었다. 서울 배문고 야구부에 진학했다. 당시 고교야구의 인기는 대단했다. 지금의 프로야구도 비교가 안 될 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70년대 초에는 대구팀이 강세였다. 경북고와 대구상고가 전국을 주름잡던 시대였다. 이 감독은 두 학교 중 한 곳으로 진학했다면 야구부에서 평범한 선수 그리고 경제적 지원은 생각도 못 했을것이라고 회고한다. 그래서 자신을 필요로 하는 타지방 야구팀을 선택했다. 그때는 모두들 힘든 시절이었다 그렇다 가난 때문이었다. 당시 배문고에서는 서울로 오면 먹여주고 재워준다고 약속했다. 여기에 매월 200원을 지급하겠다고 제안했다. 버스 요금이 2원 하던 시절, 결코 작은 돈이 아니었다. '6형제가 있는 집에 내 입 하나 덜어 주는 게 어딘가.' 그렇게 서울생활이 시작됐다.

상경해서 서른 살이 될 때까지 그를 거두어 먹여주고 재워주신 분이 있다. 그저 은사라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드는, 아버지 같은 분이었다. 바로 김인식 감독이다.

이 감독은 서른이 되어 결혼해서 분가할 때까지 김인식 감독의 집에서 생활했다. 이 감독이 "이분을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뒷골목 그렇고 그런 깡패로 지금 살고 있을지 모른다"고 고백할 정도로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함께 생활하면서 김 감독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적을 만들지 마라. 정도를 가라. 지름길로 가려고 하지 마라. 내 것부터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한다' 같은 교훈들이었다.

"그런 말씀도 하셨죠. 내가 잘 나갈 때는 세상의 누구 할 것 없이 나에게 호의적이고 친절하다. 내가 능력 있고 인기가 있을 때는 내 말 한마디에 모든 사람들이 따라주고,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마치 대통령이 된 것 같다. 하지만 그건 신기루다. 내가 인기가 없어지고 약해지면 다 떠나버리는 신기루와 같은 것이다. 내가 힘이 없어져도, 가진 것이 하나 없어도 남는 것은 사람이다. 그런 환경에 놓였을 때 곁에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인생을 제대로 살았다는 증거다. 제가 살아봐도 그렇더군요."

이 감독이 장례식장에 가면 늘 작은 해프닝이 일어난다. 야구계 후배와 제자들과 학부형들이 도열해서 인사를 한다. 덩치가 산 만한 장정 100여명이 장례식장 입구에서 인사를 하면 조폭 두목이 따로 없다. 그래서 늘 연락도 안 하고 조용히 다녀오려고 하지만 후배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늘 그런 풍경이 펼쳐진다. 현장에서는 난처하지만 돌아오면서 생각해 보면 또 알 수 없는 고마움도 느끼게 된다고 한다.

'내가 잘못 살진 않았구나.'

초등 야구부 맡은 지 3개월 만에 전국대회 우승

이 감독의 지도자 경력은 1979년에 시작됐다. 이문초등학교 감독을 시작으로 덕수상고, 광주 진흥고 감독을 역임했고, 그 중에 포항공고 감독을 잠시 맡았지만 건강상이유로 도중에 응급실로 실려 가면서 내려놓게 되었다. 현재 유신고등학교 감독을 맡고 있다. 42년 경력이다. 아직 힘이 넘친다. 목소리가 40대 감독보다 더 크다. 훈련장에서 거침없는 발언으로도 유명하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50대 감독들도 "가끔 감독님의 고함소리, 애정 어린 욕이 듣고 싶어진다"고 말한다. 우렁찬 목소리가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기 전 우여곡절이 있었다. 이 이야기 역시 김인식 감독과 얽혀 있다. 이 감독은 해병대 야구부를 지원할 예정이었다. 김인식 감독이 해병대 야구부 출신인 까닭이었는데, 해병대에 들어가면 강한 기질이 조금 누그러지지 않을까 해서 적극 추천한 영향도 있었다. 그러나 해병대 야구부가 해체되면서 김 감독의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할 수 없이 공군 승무 야구부에 들어갔다. 그러나 군대에서 야구를 그만뒀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냥 야구가 하기 싫어서였다. 그렇게 이 감독은 야구계를 떠났다.

제대 후 놀고 있는 그를 사회와 다시 연결시켜 준 것도 김인식 감독이었다. 잘 아는 건설업체 대표에게 부탁해 취직을 시켜줬다. 업체 대표는 "현장 소장을 맡길테니 2년만 참고 현장에서 일을 배워라"고 당부했다. 2년 후에는 현장 소장 타이틀을 달고 쿠웨이트로 갈 계획도 잡혀 있었다. 1년여의 시간이 흘러 일도 어느 정도 몸에 익었다 싶을 즈음 쿠웨이트로 떠날 날짜가 잡혔다. 6개월 후에 중동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계획이었다. 그즈음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이문초등학교 야구부 감독이 갑작스럽게 사임을 했는데, 감독을 맡아달라는 거였다. 쿠웨이트에 가기 전까지만이라도 팀을 이끌어달라고 매달렸다.

"그렇게 하기 싫던 야구, 보기 싫던 야구판이었는데, 막상 그라운드에 서니까 피가 끓더군요."

팀을 맡은 후 오직 야구만 생각했다. 3개월 만에 전국대회에 출전해서 우승을 했다. 갑자기 야구가 재밌어졌다. 3달 후면 쿠웨이트행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가기가 싫어졌다. 과감하게 사표를 던졌다. 불같이 화를 낼 줄 알았던 회사 대표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럴 줄 알았다. 너 야구 미련 못 버린 것 같더라. 그리고 내가 너를 1년 남짓 지켜봤는데, 넌 뭘 해도 잘할 것 같다. 야구 한번 제대로 해봐라."

오히려 역정을 낸 건 ‘야구인’ 김인식 감독이었다. "이놈아, 어떻게 해서 들어간 회사인데 그렇게 덜컥 사표를 던지냐. 이놈 성격을 고쳐야 하는데, 내가 두 손 두 발 다 들겠다" 하면서 엄청 꾸중을 했다.

"나중엔 이러시더군요. 하지만 어쩌겠냐. 네가 하겠다는데. 야구해라, 해."

선수들에게 자신감과 자긍심을 심어주려고 훈련 또 훈련

4년 후인 1984년에 덕수상고 야구부 감독으로 부임했다. 당시 덕수상고 야구부는 여러모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우선 선수들이 그렇게 오고 싶어 하는 학교가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경기 팀에서 소외된 아이들을 데려와서 마지막 기회를 주는 팀이 되어 있었다.

"마지막 기회를 얻어서 온 학교인데도 아이들이 정신을 못 차리더군요. 밤에 술을 사와서 먹는 애도 있었고, 담배 피는 애들도 있었고, 담장 넘어 도망가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임자 만난 거였습니다. 내가 누구보다 아이들을 잘 알았습니다. 내가 그렇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 아이들을 이대로 두면 나처럼 되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선수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2년 안에 어떻게든 바꿔놓아야 했다. 자신감과 자긍심을 심어주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 대목에서 김인식 감독님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네요. 사랑은 받아봐야 줄 수 있고, 은혜도 입어봐야 베풀 수 있습니다. 제가 그런 '돌깡패짓'을 해보기도 했지만, 김인식이라는 사람을 만나 사랑과 은혜를 받아봤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사랑을 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외인부대 야구부의 탄생이었다. 첫해 1승 16패를 기록했다. 그 다음 해에 외인부대 팀을 실미도 부대 팀으로 변신시켰다. 이 감독은 야구 선수로서의 성공 이전에 이 아이들을 사회에 나가게 되면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훈련이 매달렸다. 속된 말로 무식하게 훈련시켰다. 모든 일정을 선수들과 같이 했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다. 그 다음해 청룡기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우승을 했다.

"훈련밖에 살길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아이들이 한계치를 넘어서는 훈련을 경험해야 야구든 사회든 앞으로 헤쳐나갈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신념이었죠. 물론 그 와중에 낙오하는 아이도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이 방법이 최선이라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그때 함께 울고 웃던 아이들 모두 사회에 나가서 잘되어 있습니다."

당시의 제자들은 지금까지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 혹독한 훈련으로 강한 유대감이 생긴 까닭이다.

고비도 있었다. 덕수상고가 궤도에 올랐다고 생각했을 즈음 교장이 바뀌었다. 신임교장과 사사건건 갈등을 빚었다. 야구부 감독도 모르는 사이에 야구부가 전학이 와 있는 일도 있었다. 알고 보니 교장의 조카였다. 그냥 넘어갔다. 그러나 그 뒤로 라인업까지 간섭하기 시작했다. 왜 경기에 출전시키지 않느냐, 하는 등 월권이 예사였다. 한두 번은 넘어갔지만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당시 32살, 혈기왕성한 나이였다. 교장에게 "당신이 감독해라!"고 고함을 쳤다. 놀란 교장이 도망을 치기 시작했고 야구부장이 말리려고 쫓아왔다. 교장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그날로 덕수상고 감독 생활은 끝났다.

희귀병 진단 "다리를 절단해야 합니다"

"성열아, 광주진흥고 한번 맡아줘라."

지인의 전화였다. 광주란 말에 "뭐?" 하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1988년, 영호남의 지역 감정이 첨예할 때였다. 당시 광주는 광주일고 전성시대였고, 광주상고(현 광주동성고)가 끈질기게 추격하는 상황이었다. 지인의 간곡한 요청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야구를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결국 광주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현장에 도착해보니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어려웠다. 승부는 곧 전쟁이었다. 우선 어떻게 해서든지 광주일고와 광주상고라는 벽을 넘어야 했다. 선수들의 실력도 실력이었지만, 감독의 고향이 대구라는 것도 상대팀이 전의를 불태우게 하는 요인이었다. 심판도 미심쩍었다. 당시는 전국 어디나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던 시절이다.

지역 예선 경기에서 스트라이크가 볼이 되는 것은 예사였고, 도루도 웬만하면 아웃이었다. 상대팀은 정반대로 판정의 특혜를 누렸다. 실력도 안 되는데 불리한 판정까지, 말 그대로 난관이 첩첩이었다. 죽기 살기로 덤벼도 답이 안 나왔다. 화를 못 참고 경기 중에 베이스를 빼내서 집어던지기도 했고, 경기중 모자로 홈 플레이트를 빗자루 질하듯 쓸어낸 적도 있었다. 심판 자리에 소변을 퍼붓기도 했다. 기행에 가까운 항의에 번번이 퇴장을 당했다.

"더 분했던 건 심판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진다는 거였어요. 실력만 놓고 봐도 광주일고와 광주상고의 상대가 못 됐거든요."

밤잠을 설치는 나날이었다. 지는 것도 싫지만, 아이들의 장래가 달린 문제였다. 어떻게든 진학과 프로 입단 문제를 풀어줘야 한다는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다.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분에 못 이겨 술을 퍼마시다가 학교 운동장이나 정문 앞에 쓰러져 잠들곤 했다. 으레 산책 나온 주민들이 깨워서 숙소로 들여보냈다.

모자라는 실력은 발품으로 때웠다. 시즌 중에도 서울, 부산, 충청도 할 것 없이 대학이라는 대학은 다 찾아다니면서 진학을 부탁했다. 그렇게 2년의 시간이 흘렀고, 어떻게든 진학을 시켜냈다.

이러한 광경을 지켜보던 광주 주민들도 조금씩 그에게 다가왔다. "괜찮냐? 우리가 뭐 도와줄건 없냐" 하고 물어왔다. 진심이 통했던 것이다. '저렇게 살려고 발버둥 치는데, 저런 상황에서 광주 아이들을 위해 발로 뛰면서 대학에 진학시키고, 야구 실력도 성장시키는데 우리가 도와주자' 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광주분들은 따뜻했습니다. 진심이 통한 거죠. 제가 광주가 고향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4년 6개월쯤 지났을 때, 진짜 고비가 찾아왔다. 화를 삭이면서 마셔댄 술이 화근이었다. 저학년에 이대진, 임창용 등 거물급 신인이 들어왔고 이제 달리기만 하면 되는 시기였는데 몸이 견디지 못했다. 그 몸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서울로 올라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1년 정도 쉬었다.

쉬고 있는 사이에 포철공고에서 연락이 왔다. 몇 번을 거절했지만 결국 수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은 악수였다. 포항에 내려가서 6개월도 안 되어서 쓰러졌다. 구급차에 실려 포항에서 서울 세브란스 병원으로 이송됐다. 병명은 희귀성 바이러스 침투였다. 오른쪽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바로 절단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시간을 좀 주세요."

시골에 내려가 휴양을 취하며 치료에 돌입했다. 다행히 절단은 피했다. 하지만 지금도 오른쪽 다리는 무릎 이하가 시꺼멓다. 한눈에 봐도 피부가 죽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행히 걷는데는 지장이 없다.

매년 '야구인의 밤', 유신고 전통이자 장점

그렇게 시골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고(故) 하일성 선배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그의 말이 "역사는 오래지 않지만 명문고가 하나 있는데, 그곳 야구부가 성적도 변변찮고 사건 사고도 많고 해서 해체하려고 한다고 한다. 이 팀을 맡아서 정상화시켜보면 어떨까."

하 선배가 소개한 학교가 유신고였다. 그렇게 27년이라는 긴 인연이 시작됐다. 지금까지 5명의 교장과 함께했다. 어느 사이 이 감독보다 나이가 어린 교장이 부임하기 시작했다. 그만큼 세월이 흘렀다.

유신고에는 좋은 전통이 많다. 이성열 감독이 만든 전통이다. 고교 야구부 감독을 평가하는 건 쉽다. 성적만 보면 된다. 그러나 고교 야구는 트로피와 우승기의 숫자가 전부가 아니다. 야구를 한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서도 적응을 잘하게 만들고 있는지, 겨울철 비시즌에 그 학교 출신 프로가 몇 명이나 학교에 돌아와서 몸을 만들고 있는지도 봐야 한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이성열 감독은 너무나도 강성이고 강골이라고. 그러나 졸업한 선수들에게 가장 많은 전화를 받는 아마 야구 감독이다. 유신고 야구장을 찾아 개인 훈련을 하는 프로 선수들도 많다. 게다가 야구부를 거쳐간 OB들은 끈끈하게 잘 뭉치기로 유명하다. 유신고 야구부 전통의 중심에 이성열 감독이 있다. 그가 유신고의 전통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올해는 강당을 새로 짓고 있다. 강당이 연말 전에 완공되면 강당에서 ‘야구인의 밤’을 가질 계획이다. 이 감독은 "야구부 출신 선배들과 현역이 정기적으로 만남을 가지고 형제처럼 지내는 곳이 많지 않다. 유신고만의 장점이다"고 소개했다.

"미쳐도 적당히 미쳐야지"

한평생 야구만 보고 달려왔다. 아내는 "내 남편은 야구와 결혼했다"고 말한다. 틀린 말도 아니다. 결혼 37년차지만, 아내와 함께한 햇수는 17년 남짓이라고 했다. 20년은 야구 관련 일 때문에 떨어져 지냈다. 이 감독은 "아내가 늘 '저 양반은 얼굴 잊어버릴 때쯤이면 집에 들어온다'고 말했다"면서 "표현을 못해서 그렇지 아내에게 늘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다"고 밝혔다.

아내와 어떻게 만나고 프로포즈를 했느냐는 질문에는 여느 아버지들처럼 쑥쓰러워하면서 세 번이나 답변을 거절했다. 그러다 마지 못 해 꺼내놓은 말이 "이런 말 하면 뭣한데, 우리 아내가 미인이야" 하는 게 전부였다.

30여년 동안 가족들과 그 흔한 가족 여행 한번 못 가봤다. 아내가 아들의 입대를 앞두고 성화를 부려 얼마 전에 가족여행을 결행했다. 가족여행이라고는 하지만 여느 집처럼 온 가족이 함께 집에서 출발해 다시 돌아오는 여행이 아니었다. 이 감독이 제주도에서 전지훈련을 하고 있었고, 아내가 아들을 데리고 제주도에 내려온 것이었다. 그것이 '이성열 일가'의 첫 가족여행이었다.

이 감독은 한 마디로 야구에 미친 사람이었다. 반드시 1등이 아닐지라도 자신이 하는 일에서 보람과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행복한 인생이 있을까. 그저 야구가 좋아서, 무조건 이기고 싶어서, 야구 외에는 도무지 마음에 차는 일이 없어 정신없이 달려온 인생이었다. 혹자는 말했다.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것을 원 없이 즐기고 미쳐서 놀아버리면 그것이 결국 직업이 된다"고. "미쳐야 미친다는 말이 생각 납니다" 하는 기자의 말에 이성열 감독이 이렇게 대꾸했다.

"미쳐도 적당히 미쳐야지. 난 그게 문제야."

이 감독은 "말 나온 김에 미친 소리 한번 더 하겠다"면서 야구계 대선배로서 늘 마음에 품고 있는 말을 끄집어냈다.

"지금 코로나로 모두 어려운 상황입니다. 야구계라고 피해갈 수는 없겠지요. 프로야구 10개 구단에서도 보유선수를 대폭 줄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프로와 대학이 어려운 상황인 것을 알지만 선수를 조금이라도 더 뽑아주었으면 합니다."

잠시 뜸을 들인 뒤 실업 야구 이야기를 덧붙였다.

"언제고 실업 야구가 다시 부활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다음 세대 아이들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야구를 계속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야구인은 야구만 계속할 수 있으면 더 바라는 게 없습니다. 그것은 제 삶을 견인하고 지탱한 단 하나의 열망이기도 했습니다."



박상은 기자 subutai1176@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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