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기억’은 덧씌워지는 걸까, 잊히는 걸까. 뇌 과학계에는 공포기억 소거법에 대한 두 가지 학설이 있다. 새로운 기억이 덧씌워져 기존의 공포기억을 억제한다는 ‘뉴러닝’과, 공포기억 자체도 약화돼 지워질 수 있다는 ‘언러닝’이다. 그동안은 나쁜 기억은 새로운 기억에 의해 잠시 가려질 뿐이라는 ‘뉴러닝’ 학설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한국 연구진이 나쁜 기억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는 메커니즘을 세계 최초로 발견하면서 ‘언러닝’ 학설에 힘을 보탰다. 연구결과는 신경과학 분야 최상위 국제학술지 ‘뉴런’에 7일 게재됐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6일 강봉균 서울대 교수 연구팀이 뇌에서 공포기억이 사라지는 원리를 ‘시냅스’ 수준에서 규명했다고 밝혔다. 시냅스는 신경세포 사이의 신호를 전달하는 연결지점으로, 네트워크로 구성된 뇌 연구에서는 시냅스 수준의 변화를 밝히는 게 중요하다.
‘기억저장 시냅스’가 기억의 상태를 반영하는 물리적 실체란 점을 발견한 연구팀은, 공포기억이 형성되는 편도체에서 시냅스의 구조적 변화를 추적했다. 그 결과, 공포기억이 형성된 ‘기억저장 시냅스’의 크기가 감소해 공포기억도 약화된다는 점을 찾아냈다. 영원할 것으로 예상됐던 나쁜 기억이 약해져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다.
이 사실은 ‘청각 공포기억 학습’과 ‘공포기억 소거’ 실험을 통해 증명됐다. 연구팀은 자체 개발한 'dual-eGRASP' 기술로 실험쥐의 기억저장 시냅스를 종류별로 표시했다. 공포기억이 형성되고 소멸하고, 재학습하는 과정에서 기억저장 시냅스가 어떤 변화를 보이는지 추적하기 위해서다. 그 결과, 공포기억을 학습하자 기억저장 시냅스 크기가 커지고, 반대로 이 기억을 소거하면 기억저장 시냅스 크기가 감소했다. 기억 상태 변화에 따라 기억저장 시냅스의 상태도 변한 것이다.
연구진은 특정 사건 후 일상적인 자극에서도 공포를 느끼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치료에도 이 메커니즘이 적용될 수 있다고 예상했다. 실험쥐와 인간의 뇌는 작동원리가 같은데, 기억저장 시냅스에 조작을 가해 공포 반응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상용화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시냅스를 인위적으로 변화시켰을 때 사라지는 기억의 범위를 선택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지, 다른 기억 상태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등에 대한 후속 연구와 임상시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강 교수는 본보와 통화에서 “나쁜 기억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고 잠시 가려질 뿐이라는 학설이 지배적이었는데, 이번 연구를 통해서 기억을 저장하고 있는 시냅스가 약화되면 나쁜 기억이 떠오르지 않을 수 있다는 희망적인 사실을 밝혀냈다”며 “진행 중인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극복을 위한 여러 임상 시험에 이 메커니즘이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