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시게 아름다운 고려 지광국사 사리탑, 100년만의 귀향 기다리다

입력
2021.08.14 11:00
16면

편집자주

우리 역사를 바꾸고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한 발견들을 유적여행과 시간여행을 통해 다시 한번 음미한다. 고고학 유적과 유물에 담긴 흥분과 아쉬움 그리고 새로운 깨달음을 함께 즐겨보자.


<7> 지광국사현묘탑과 원주 법천사지유적

지광국사현묘탑(智光國師玄妙塔). 고려의 가장 아름다운 사리탑이다. 만일 내년에 돌아온다면 110년 만의 귀향이다. 강원도 원주 시민들의 오랜 염원이기도 하다. 점심을 하기 위해 들른 부론면 한 식당의 벽에도 100년의 염원을 담은 그림이 붙어 있어 지역민의 애틋한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국보 101호인 지광국사현묘탑은 고려의 대표적인 조각품으로 알려져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나라 격동의 현대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일제 수탈의 아픈 역사를 겪고 서울 경복궁 뜰에 전시돼 있던 탑은 한국전쟁 시기에는 폭격을 맞았다. 새로 건립된 용산 국립박물관으로 이전이 불가능해 2016년부터 국립문화재연구소의 해체 수리 복원이 진행됐고 이제 원래 자리로의 귀환을 앞두고 있다. 그 탑이 원래 있던 절은 약 1,300년 전인 8세기 초 신라 후대에 창건된 법천사다.

탑은 볼 수 없지만 오랜만에 발굴 현장을 볼 수 있다는 설렘을 안고 길을 나섰다. 문막읍에서 오라는 강원고고문화연구원 발굴단원 제자의 안내를 무시하고,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대로 여주IC에서 장호원 방향으로 남행했다. 경기와 충북의 도 경계를 넘나들면서 작은 고개를 넘자마자 시원하게 탁 트인 남한강이 나타났다. 다리를 건너면 바로 만나는 곳이 바로 원주시 부론면이다. 절터는 부론 마을에서 3분도 걸리지 않는다.

반달지형 위의 절터 풍경

선녀처럼 화사한 하얀 연꽃이 피어있는 서쪽 연지에서 바라보는 법천사 발굴 현장은 말 그대로 장관이다. 사방으로 낮은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데, 함지박처럼 생긴 지형의 중간을 동북 방향에서 흘러온 법천천이 서남 방향으로 좁은 골짜기를 만들어 남한강으로 빠져나간다. 법천(法泉), 즉 '진리의 샘'이라는 이름의 유래 역시 심상치 않게 들린다. 동편엔 산지와 연결된 평탄한 반달지형에 5만여 평에 달하는 절터가 있고 서편에는 법천천을 건너 작은 마을이 있는데 예전에는 사하촌이 있었을 법하다.

평탄 지형의 남쪽 끝에 당간지주가 있으니 그곳이 절의 입구인데, 절터 중앙에 수백 년 수령의 정자나무가 서 있는 것으로 보아 절이 없어진 뒤로는 반대편 마을로 이어지는 길이 절의 중앙을 가로질러 났을 것이다. 연당의 바로 앞에는 지난 20여 년간 14차례에 달하는 강원고고문화연구원의 발굴로 절터 건물지의 주춧돌들이 노출돼 열을 지어 펼쳐져있다. 그 뒤편으로는 아미타불을 모신 것으로 추정하는 법당을 포함하여 복원된 화강석 건물기단들이 푸른 잔디와 확연히 대조돼 보인다. 연결된 산비탈에는 여러 단의 석축이 하얗게 빛나고 있다. 바로 지광국사현묘탑과 탑비(승려의 행적을 기록한 비)를 모신 자리이다. 옛 기록에는 절 뒤의 동쪽 언덕이라고 되어 있으니 아마도 그 자리에서 다비식(불교의 장례의식)을 하였을 것이다.

지광국사가 마지막 누운 자리

벼락을 맞아 꼭대기가 잘려나간 구부정한 향나무가 끈기 있게 서 있는 가람(복원됨)의 입구부를 지나서 탑비가 있는 곳으로 올라 갔다. 산사면의 모서리를 이용해 좁게 조성된 곳이어서 지그재그로 이어지는 급한 계단을 하나씩 오를 때마다 땀이 비오듯했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비석을 보려는 기대감이, 그리고 흐르는 땀과 함께 이승의 고민이 사라질 것이라는 또 다른 기대감이 다리를 움직이게 했다.

그 부도탑(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봉안한 묘탑)이 있었던 자리에는 ‘영혼이 머문 자리’라는 안내 간판이 탑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었고, 검은색 돌에 조각과 글씨가 아름답게 새겨진 탑비가 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모습이 새겨진 높다란 비석을 등에 지고서 부도탑이 있던 텅빈 자리를 향해 앉아 있는 모습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을 저리게 한다. 헤어짐은 만남을 의미하겠지만 기다림을 지켜보는 마음은 안쓰러울 수밖에 없다.

탑자리와 비를 보며 느낀 감동은 돌아서는 순간 또 다른 감동으로 이어진다. 삼복의 뙤약볕 아래 발굴을 통해 수백 년 감춰진 속살이 드러난 절터를 내려다보는 순간 도솔천(불교에서 미륵보살이 사는 곳)에서 이승을 내려다보는 느낌이 드는 것은 조성자의 깊은 뜻이리라. 이 자리에서 한 소식 깨우치라는 말씀인 듯하다. 아마도 지난 천년 가까운 세월 동안 수백만의 사람들이 이 자리에서 스스로 성찰하는 순간이 있었으리라.

고려문화의 정수, 지광국사부도탑

그 빈자리에 있었던 부도탑은 우리가 절 입구의 한쪽 켠에서 흔히 보아오던 부도탑이 아니었다. ‘부처가 되었다’는 뜻을 가진 네모난 부도탑에는 한 치의 공백도 없이 다양한 모습의 연꽃, 비천, 불상, 그리고 사리를 모시는 광경을 서사적으로 그린 고부조(高浮彫) 조각으로 화려하고 장엄하게 장식되어 있다. 이 탑에서 나왔을 수도 있는 고려시대 푸른색의 유리사리구는 그 영롱함이 깊고 푸른 바다의 신비를 비치는 듯하고 또 다른 유리병으로 된 사리구는 무지개빛으로 반짝인다.

국보 59호인 탑비에 새겨진 해린(海麟·지광국사의 법호)이 꿈꾸던 이상세계와 ‘고려’라는 나라의 유래를 표현한 삼족오(三足烏)와 같은 상징을 보면 큰 뜻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이렇듯 우리 문화사에서 유례가 지극히 드문 부도탑을 조성한 것은 그만큼 지광국사가 당시의 고려인들에게 존경받는 스님이었음을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고려의 예술적인 경지가 그만큼 높았음을 웅변하고 있다. 이 탑을 보지 않고는 고려의 예술과 사상을 논할 수 없을 경지인 것이다.

지광국사가 어떤 스님이었길래 이렇듯 공을 들인 예술품들이 남아 있을까? 현재 여기에 남아 있는 비신(碑身)을 지고 있는 거북의 등에는 왕(王)자가 무늬로 새겨져 있다. 지광국사 해린은 이곳 출신으로 어릴 적 법천사에서 관웅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학했고 만년에는 이곳으로 다시 돌아와 입적하였다. 고려 현종이 왕사로 모셨고 입적 15년 후인 1085년 고려 왕실에서 최고의 정성으로 이곳에 부도와 비를 모셨던 것이다. 부도탑과 비가 자리한 언덕 구역에는 여러 채의 작은 건물들이 연결되어 있는데, 아래쪽 절의 가람들과는 달리 자연석이 아닌 잘 다듬은 주초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 특별한 공을 들인 구역임을 알 수 있다.

한국의 강사, 세계유산적 가치

법천사와 부근의 거돈사, 흥법사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하려는 노력이 시작되고 있다. 이미 등재된 산사(山寺)가 한국 불교의 기도하는 도량(부처와 보살이 머무는 신성한 곳)이라면, 남한강과 섬강의 합수 지점에 배치된 이 강사(江寺) 절터들의 사회경제적 가치가 특별하다는 의미이다. 고려시대에는 절들이 지역경제의 거점 역할을 했는데 법천사 역시 이 지역 물류거점시설이었던 흥원창(興元倉)과 연결되어 각 지역의 물산들을 모아서 개경으로 보내는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이곳에서 발견된 동진(東晉)의 양형(羊形)청자나 다수의 중국 도자기편으로도 과거 물류 거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서울까지는 바람만 좋다면 하루쯤 걸렸다. 지난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남한강 수로를 이용해 서울로 향하는 배나 뗏목은 이 지역의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기록에는 법천사에 공부하는 승려들뿐 아니라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살았다고 하는데 오늘날 촘촘히 드러난 절터의 건물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아궁이가 있는 작은 방들은 분명히 사람들이 기거한 공간이었을 것이고 그러한 집들이 처마로 연결되어 비를 맞지 않고도 최근 발굴된 별원(승려가 주거하는 장소)에서 법당으로 갈 수 있었을 것이다.


문화유적 발굴현장에 서 있는 즐거움

현재 발굴 중인 별원의 남쪽 구역은 조선시대 조성된 곳인데 이 시기에 화엄종의 자복사(資福寺·국가에 복이 있기를 기원하는 절)로 선정된 기록이 있다. 당시에는 유학자들이 많이 드나들었던 것으로 보이고 조선 초기의 한명회나 서거정 같은 유학자들도 이 절에서 공부했다고 알려진다. 홍길동전으로 유명한 허균이 기록한 이 절의 내력을 보면 임진왜란으로 절이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왕조가 바뀌어도 절은 유구했겠지만, 이제 그 절은 사라지고 땅속에 남은 흔적들만이 인간의 정성스러운 삶을 말한다. 그 속에 담긴 고려 혼들이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그 탑을 기다리고 있다. 나에게는 2년 전 국립박물관 ‘대고려전’에 전시된 희랑조사(신라 말기 화엄종 학승)가 제자였던 왕건을 기다린 순간들이 생각나는 시간이다. 뜨거운 삼복 볕이 쏟아지는 폐사지에 홀로 서서 우리 문화의 영화스럽던 역사를 돌이켜 보는 이 순간 역시 탈서울의 즐거움이다.



글·사진=배기동 전 국립중앙박물관장·한양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