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검사받던 노인은 욕설을 쏟아냈고, 난 폭발하고 말았다

입력
2021.08.17 17:00
25면
[내가 살린 환자, 나를 깨운 환자]
<25> 김경중 공중보건의

편집자주

의료계 종사자라면 평생 잊지 못할 환자에 대한 기억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생명을 구한 환자일 수도 있고, 반대로 자신에게 각별한 의미를 일깨워준 환자일 수도 있다. 아픈 사람, 아픈 사연과 매일 마주하는 의료인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딱 1년 전 이 무렵이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도시 전남 순천에도 코로나19가 본격적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간헐적으로 확진자가 나오긴 했지만, 다 합쳐도 10명 이내였다. 그러다 8월 광복절 전후로 시작된 2차 대유행 물결은 마침내 순천까지 상륙했다. 일주일 만에 50명의 확진자가 나왔다. 인구 비례로 보면 서울에 1,700명 확진자가 나온 것과 비슷한 규모로 보면 된다.

모든 건 한순간이었다. 순천만습지, 국가정원 등 관광지는 텅 비었고, 길거리엔 인적조차 찾기 힘들었다. 단 일주일 만에, 순천은 정적에 빠진 도시가 되어 버렸다.

선별진료소만 인산인해, 아비규환이었다. 난 이곳 공중보건의다. 헬스장, 학원, 어린이집, 카페, 병원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확진자들이 발생했고, 수많은 접촉자가 검사를 받기 위해 몰려왔다. 많은 날은 하루 2,000명까지 검사를 했다. 우는 아이를 달래가며 검사해야 했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어르신들에게 큰소리로 외치면서 문진표를 작성해나갔다. 검사 자체가 아파서 엉엉 우는 사람들도 있었다.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쉬지 않고 일해도 검사받으러 오는 사람은 줄지 않았다. 매일매일 이를 악물고 참고 또 참았지만, 하나둘 쓰러지는 의료진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저 멀리서부터 아주 큰 목소리로 항의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 이리 사람이 많아? 검사는 언제 해주냐? 더워 죽겠는데,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

한 남성 노인이었다. 그는 검체 채취를 기다리며 온갖 불평불만을 쏟아냈다. 검체 채취는 본래 입과 코를 통해 두 차례 이뤄진다. 입 안쪽에 있는 구인두벽에서 채취하는 경우, 검사 도중 구역감이 유발될 수도 있다. 많은 분들이 검사를 받아봐서 알겠지만, 더 고통스러운 건 비인두 검체 채취다. 깊숙이 위치한 비인두 후벽에서 검체를 채취하려면, 상당히 긴 면봉이 코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 과정에서 비강 내 점막들을 건드리게 되고, 이때 상당한 통증과 불편감을 느낄 수 있다. 그 느낌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 노인도 구인두 검사까진 잘 버텼다. 하지만 비인두 검사가 문제였다. 코안으로 면봉이 들어오자마자, 검사자의 손을 잡고 코에서 면봉을 빼버렸다. 그러더니 검사 자체를 거부했다. 몇 번의 실패 후 간신히 설득한 끝에, 결국 면봉을 코안 깊숙이 넣을 수 있었다. 끝나자마자 그는 의료진을 향해 차마 글로 옮길 수 없는 거친 욕설을 쏟아부었다. 지켜보던 나는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저희 검사 계속 진행해야 하는데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돌아가서 자가 격리하시죠.”

“너는 뭔데 끼어들어?” 그리고는 나를 옆으로 확 밀쳤다.

“이게 얼마나 아픈지 니가 알아?”

“압니다. 아픈 거 저도 알아요.”

“웃기지 마! 제대로 알 수 있게, 내가 니놈 코 한 번 찔러줄까? 어?”

그 순간 나는 이성의 끈을 놓아버렸다.

“네! 직접 제 코에 한 번 찔러 넣어주시죠. 마음대로 해보세요!”

수많은 사람이 쳐다보고 있는 와중에 나는 마스크를 내리려고 했다. 그때 직원들이 달려와 일이 커지는 걸 겨우 막았다. 그렇게 사태는 종료됐다.

돌이켜보면, 노인과의 말다툼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사실 노인으로선 처음 받아보는 코로나 검사였고, 충분히 놀라고 화날 수도 있었다. 반면 나는 여러 차례 검사를 받았고, 타인에겐 수천 번 검사를 진행했다. 너무나도 당연해지고 익숙해진 나머지, 노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향해 분노를 터트렸던 것이다. 설령 화가 나더라도 의사인 나는 참았어야 했다.

의사가 된 지 이제 겨우 2년이다. 장차 어떤 분야의 전문의가 될지, 앞으로 의사로서 어떤 인생을 추구할지, 3년간 공중보건의로 복무하며 결론을 내리자는 게 나의 원래 계획이었다. 그러나 예상 못한 팬데믹 사태가 닥쳤고, 상상도 못한 사투가 이어지며 나의 고민은 한층 더 복잡해졌다.

2020년 여름은 그렇게 지나갔다. 나도 변했고, 순천도 변했다. 11월에 또 한 번 큰 유행이 찾아왔지만, 이전과는 달랐다. 8월의 대유행의 경험 덕분에, 다들 단단해진 것이다. 시민들은 혼란이나 공포에 빠지지 않고 침착하게 상황에 적응했다. 의료진들도 긴밀하고 체계적으로 대응해나갔다. 서로의 이해가 형성되면서 노인과 충돌했던 것과 같은 현장의 갈등상황도 대부분 사라졌다.

나 역시 당장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실천해 나갔다. 아무리 바빠도 선별진료소를 찾아오는 환자분들을 향해 말 한마디라도 건네기 시작했다.

“검사 아픕니다. 불편해요. 힘드시겠지만, 딱 한 번만 참으세요.”

이 말을 듣는다고 통증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길 바라면서 환자들을 향해 계속 말했다. 또한 나를 위해서 하는 말이기도 하다. 환자를 대할 때 익숙함에 빠지지 말자는 다짐을 떠올리기 위해서다.

벌써 네 번째 대유행이다. 끝을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절망감을 느낄 때도 많다. 하지만 결국은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며 공감하는 것만이 코로나 세상에서 버틸 수 있는 유일한 힘이라는 것, 초보 의사가 코로나19 현장에서 1년 반을 보내며 내린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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