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제주의 날씨 예보는 ‘맑음’이다. 미루고 미뤘던 빨래를 널었다. 거짓말 같이 소나기가 내렸다. 금세 지나갈 조짐이라 내버려 뒀는데 검은 구름이 자욱하다. 물싸움이라도 하듯 드럼통으로 들이붓는 꼴이다. 폭우로 자연 세탁(?)되는 빨래를 훔쳐보며 문득 칠레의 ‘라파누이(Rapa Nui)’가 떠올렸다. 그리고 요즘의 제주를 다시 보았다. 포스트 코로나 시국에도 ‘오버투어리즘(수용력을 초과한 과도한 관광객 유입)’의 가속 페달을 밟고 있는 이곳을.
라파누이 공항에서 숙소로 가는 짧은 풍경에 제주의 냄새가 물씬 올라왔다. ‘태평양의 제주’란 별칭이 허튼소리는 아니었다. 눈가로 치고 올라오는 꿉꿉한 습도, 손으로 은혜롭게 쌓아 올린 돌담, 해변이 아닌 항구에서 벌어지는 현지인의 물놀이, 그와 별개로 대낮부터 맥주 캔을 따며 하늘을 찢는 여행자의 웃음들. 그 모두 제주와 판박이였다.
이 섬의 날씨도 신의 몫이었다. 비가 왔다가 그치고 다시 퍼부었다가 여행을 포기할라치면 새침하게 햇빛이 쨍쨍했다. 바람만큼이나 변화무쌍한 나날이었다. 너무하다 싶게 제주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섬엔 돈이 없다는 거였다. 은행은 있다. 그러나 잔고가 충분하지 않다. 타국에서 칠레 산티아고로 입국해 바로 이곳으로 향한 우리는 한동안 빈털터리 신세였다.
“라파누이에 간다고? 거긴 어마어마하게 비싸.”
칠레 산티아고에서의 깊은 밤. 한 칠레인은 눈을 부라리며 경고하듯 이야기했다. 귀가 얇아 산티아고에서 장을 좀 보고 가야 하나 싶었으나 다음날 새벽 비행기였다. 제주를 자주 찾는 생활 여행자가 아니라면 공감을 할지도 모르겠다.
섬은 기본적으로 물자 조달에 한계가 있다. 제주로 이주한 4년 전보다 나아졌다고 해도 배송비가 주문하는 물품의 가격보다 높아 구매를 포기하는 게 다반사다. 파손 우려 등의 이유로 아예 배송이 금지된 물건도 있다. 삼다수를 빼고(?) 뭘 사도 육지보다 비싼 편이다. 고로 라파누이의 물가는 어느 정도 각오한 것이었다. 더불어 현지인도 살고 있으니 그곳에도 (저렴한 물가로) 살아 날 구멍은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라파누이는 이스터섬(Easter Island)으로도 불린다. 1722년 네덜란드 탐험가에 의해 부활절에 발견돼 붙여진 지명이다. 태평양 동부에 있는 외딴 섬, 땅 크기로 따지면 제주 6분의1에 정도인 163.6㎢ 면적이다. 지리적으로 폴리네시아(중앙 및 남태평양에 있는 섬의 집단)에 속하고, 원주민은 아주 먼 옛날 서에서 동으로 태평양을 횡단한 이들의 후손이다. 가장 가까운 유인도는 핏케언제도(Pitcairn Islands). 약 3,700㎞ 떨어진 칠레에 비하면 절반 거리 이웃이다. 폴리네시아에 뿌리를 둔 현지인들에게 어느 나라 사람인지 물어보라. “나는 라파누이인이야.” 눈빛을 반짝거린다. 강국의 땅따먹기, 노예 수탈을 견디면서도 ‘라파누이’란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칠레는 자기네 영토라 주장하지만 칠레가 아니다.
이곳 라파누이엔 전 세계인을 자석처럼 끌게 하는 자산이 있다. 모아이(Moai) 석상이다. 제주의 지역색을 드러내는 돌하르방 같은 상징물이다. 규모나 양, 기원의 미스터리를 둘러싼 스토리텔링이 줄줄이 사탕이어서 세계적 인지도는 돌하르방을 훨씬 능가한다.
섬 안의 모아이 수는 공식적으로 600여 개. 평균 키는 약 4m, 무게는 14톤에 달한다. 누구는 서 있고, 누구는 누워 있으며, 때론 갸우뚱 뒤로 넘어갈 자세도 있다. 모아이를 가만히 보노라면 이성을 뛰어넘는 신비에 다가간다. 변변치 않은 도구로 어떻게 석상을 조각했지? 채석장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이곳까지 옮긴 비책이 뭐야? 심지어 외계인과의 내통설이 돌 만큼 화끈한 추측과 과학적 해석이 뒤따른다. 라파누이인들은 미스터리의 답을 마나(mana)로 보았다. 초자연적인 힘이라고 믿었다.
제주를 찾는 이유는 올레길 산책, 오름 탐방, 건축이나 맛집 투어 등 여러 가지지만, 라파누이의 여행 방식은 오로지 모아이 중심이다. 80달러나 되는 통합 입장권 구입해야,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모아이 유적 입장 자격이 주어진다. 누군가는 라파누이의 유일한 해변인 아나케나(Anakena)에서 한량이 되고, 또 다른 이는 화산 분지 옆에 있는 오롱고(Orongo)에서 짧은 트레킹을 하며 경이로운 자연에 감복한다.
모아이의 채석장으로 알려진 라노라라쿠(Rano Raraku)는 그 자체가 끌림이다. 모아이의 생로병사를 목격할 수 있다. 암벽에 조각되다가 성인이 되지 못한 유아기부터 미처 다른 곳으로 옮기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노년기의 모아이가 푸른 구릉 들판 사이로 작품처럼 전시돼 있다. 불균형 속 균형이다.
통가리키(Tongariki)는 라파누이 엽서 사진의 대표 주자다. 15개의 모아이가 당당한 풍채로 바다를 등지고 서 있다. 하늘과 땅 사이를 중개하는 이 석상군은 기막힌 낙조 명당으로도 알려져 섬에 머무는 동안 최소 두 번의 방문을 유도한다.
이 섬을 여행할 때 한 가지 명심할 일이 있다. 어디로 향하든 생존을 위한 비상 식량을 구비해야 한다는 것. 카페나 상점 등 편의 시설이 있다해도 비싸거나 예고 없이 마감 상태다. 아예 없는 관광지도 허다하다. 모든 편의 시설은 라파누이의 중심이자 베이스캠프 격인 항가로아(Hanga Roa)에 집중돼 있다. 제주라면 모아이 명소마다 카페나 식당은 기본이요, 멋진 전망을 뽐내는 숙소가 몇 채는 지어지지 않았을까. 라파누이는 적당한 불편과 자산 보호의 조화가 있었다.
올해 제주는 매달 1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을 수용하고 있다는 기사가 속출하고 있다. 해외여행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국내에 발목이 묶인 이들의 피난처다. 평소 한적한 해안도로조차 무분별한 주차로 차량 정체가 생기고, 유행을 탄 오토캠핑으로 민원이 속출하며, 무분별한 쓰레기 투기로 현지인은 얼굴을 붉힌다. 자연스레 입도세 논쟁도 다시 떠올랐다.
영국의 한 여행사(Responsible Travel)는 오버투어리즘 지도에서 국내에서 유일하게 제주를 지목했다. 관광객 수가 지역이 소화할 수 있는 한계치를 넘고 있으니 제주에 붙여진 오명이 한편으론 당연해 보인다.
제주는 오늘도 뚝딱뚝딱 공사 중이다. 일몰 명소이자 자주 수영을 하던 포구에 보트, 카약 등 각종 체험 시설이 생겨 요즘은 발길을 끊었다. 어제 본 제주와 일주일 후의 제주가 다르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제주 역시 변한다. 다만 그 변화의 방향이 옳은지 고민할 시점이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 라파누이의 매력을 떠올리다가 제주의 현실을 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