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사회의 제재가 길어지면서 극심한 경제난에 시달리는 북한이 미국과의 대화 재개 조건으로 정제유 수입과 광물 수출 허용 등을 제시한 것으로 파악됐다. 특히 고급양주와 양복 등도 수입 요청 목록에 포함됐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직접 “전쟁 못지않은 시련”에 빗댈 만큼 식량 위기가 심각한 상황에서도 뒤로는 지도층의 ‘사치품’ 확보에 골몰하고 있는 셈이다.
3일 국회 정보위원회 간사인 김병기 더불어민주당ㆍ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에 따르면 국가정보원은 이날 열린 정보위 전체회의에서 “북한이 북미회담 전제 조건으로 광물 수출 허용과 정제유 및 생필품 수입을 미국이 허용해야 한다고 했다. 생필품에는 고급 양주와 양복도 들어 있다”고 보고했다. 양주와 양복은 김 위원장 일가와 평양 상류층이 주로 소비하는 물품으로 대표적인 대북제재 대상이다. 하 의원은 “김 위원장 혼자 소비하는 게 아니라 평양 상류층에게 배급하는 것”이라며 “상류층 생필품이어서 생필품을 (대북제재 품목에서) 풀어주라는 내용이 확인됐다”고 말했다. 북한은 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정상회담에서도 생필품 수입을 포함한 대북제재 해제를 강하게 주문했었다.
북한의 이런 요구는 최근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절을 떠올릴 정도로 위기가 고조된 내부 상황과 괴리돼 있다는 분석이다. 김 위원장은 지난달 27일 개최된 전국노병대회에서 “사상 초유의 세계적 보건위기와 장기 봉쇄로 인한 곤란과 애로는 전쟁 상황에 못지않은 시련의 고비가 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북한의 올해 식량 생산량이 연간 수요인 548만 톤에 비해 100만 톤이나 부족할 것이란 국제기구의 보고서도 공개됐다. 우리 정보당국은 북한 당국이 식량 재고가 바닥나 전시 비축미까지 주민들에게 풀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정대진 아주대 통일연구소 교수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북한 해외공관 활동에 제약이 생겨 사치품 수급도 원활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라며 “북한의 극소수 상류층은 여전히 사치와 향락을 즐기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