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가 초래한 '브레인 공백'에... 바이든표 기후변화 대응도 지지부진

입력
2021.08.0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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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시절 과학자 수백명 사직... 충원은 더뎌
'과학의 정치화' 우려해 정부기관 취업 꺼리기도
전문가들 "당분간 과학자 부족 지속될 듯" 우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취임 전은 물론, 재임 4년 내내 “지구온난화는 사기”라고 주장했다. 기후변화 문제는 철저히 외면하기만 했다. 그런 그가 물러나고 ‘기후위기 대응’을 국정 과제로 내세운 조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선 지 6개월이 지났는데도, 미국의 기후대응 움직임엔 좀처럼 속도가 붙지 않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 시절 정부기관을 떠난 과학자 수백 명의 자리가 여전히 공석으로 남아 있는 탓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관련 예산을 늘리며 전문가 모시기에 나섰지만 뚜렷한 진전은 없다. 트럼프가 야기한 ‘브레인(두뇌) 공백’ 사태가 바이든의 발목을 잡고 있는 셈이다.

1일(현지시간) 미 일간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바이든 대통령의 기후변화 정책은 현재 답보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2050년까지 탄소 중립을 이뤄내겠다’는 의욕적인 청사진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 연구 활동이나 세부 실행 방안 마련 등은 지지부진하다는 것이다. ‘기후변화가 국가안보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를 제출해야 했던 미 국방부가 마감 시한을 60일이나 연장하고도 최종 기한(5월)을 지키지 못한 게 대표적이다.

가장 큰 이유는 트럼프 집권 시절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정부기관을 떠난 기후변화 전문인력의 빈자리가 지금도 채워지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2019년 파리기후변화협약 일방적 탈퇴를 비롯, 시종일관 기후변화를 무시했던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질려 버린’ 수백 명의 과학자ㆍ연구자들은 소속 기관에서 사직했다. 예컨대 주무부처인 미국 환경보호청(EPA) 소속 전문가 수는 트럼프 재임 기간 중 24% 감소했고, 기후위기 연구를 담당하는 지질조사국 과학자 수도 8% 줄었다. 농무부 산하 관련 기관 2곳은 2019년에만 직원의 75%가 감소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직후 과학자 충원에 공을 들였다. 정부기관 소속 과학자 추가 채용을 위해 EPA 예산을 90억 달러에서 112억 달러로, 지질조사국 예산은 13억 달러에서 16억 달러로 각각 증액했다. 보건부나 재무부 등 종전까진 기후변화 담당 과학자가 없었던 기관에도 관련 보직을 신설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돌아오지 않고 있다. 최근 국방부는 기후 위기 전문가 8명을 충원했는데, 여전히 17개 자리가 공석이다. 이런 추세가 지속되면 ‘바이든표 기후정책’도 수개월 또는 수년간 유예될 수 있다는 게 전ㆍ현직 EPA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NYT는 ‘과학의 정치화’가 근본적 문제라고 진단했다. 트럼프 행정부를 거치며 ‘정부와 함께 일하면 내 연구가 정치적으로 곡해될 수 있다’는 우려가 과학자들한테 깊이 스며들었고, 그 결과 정부기관 취업 자체를 꺼리게 됐다는 얘기다. 실제로 트럼프 정권 당시, 지질조사국은 기후변화 영향 모델링 연구에서 일부 데이터만 제한적으로 사용해 ‘대통령 입맛’에 맞는 연구 결과를 도출하려 한 적이 있다. EPA에서 38년간 근무한 뒤 웨이크포레스트대로 자리를 옮긴 윈스턴 살렘은 “학생들도 EPA가 좋은 기관이라 생각하지만, 자신의 연구가 정치적으로 악용될지 모른다고 여긴다”고 말했다.

게다가 ‘정부기관 기피’ 현상이 단시간엔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과학계 원로와 행정 전문가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오바마 행정부의 최고 과학고문이었던 존 홀드런 하버드대 환경정책학 교수는 “과학에 대한 공격은 트럼프 행정부의 수명보다 더 오래 지속된다”고 지적했다. 비영리단체 ‘공공서비스파트너십’의 대표 맥스 스티어는 “현 정부가 지난 정부와 달리 친과학적이라는 점만으로 해소될 문제가 아니다”라며 “모든 걸 한 번에 제자리로 돌려놓을 순 없다”고 토로했다.

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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