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많은 기업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세계 시장에서 1위로 우뚝 선 신생기업(스타트업)이 있다. 바로 아이유노SDI 미디어그룹이다.
이 업체는 영상에 세계 각국 언어로 자막을 넣거나 녹음(더빙)하는 현지화 분야에서 세계 1위이자 세계 최대 기업이다. 이들이 100개 이상 언어로 현지화 작업을 한 영상은 전세계 인터넷 영상 서비스(OTT)업체들을 통해 190개국에서 제공된다.
넷플릭스, 디즈니, 아마존, HBO, 소니픽처스, 폭스, 워너브라더스, 디스커버리 등 이름만 대면 알만한 전세계 유명 OTT 업체들과 영상 제작사들이 아이유노에 자막 및 더빙 등 현지화 작업을 맡긴다. 세계 최대 OTT 넷플릭스만 해도 아이유노에서 62개 언어로 현지화한 영상을 190개국에 내보낸다. 업계에서는 아이유노가 없으면 넷플릭스도 서비스 하기 힘들다고 말할 정도다.
그러나 아이유노의 성공은 하루 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서울에 작은 골방에서 시작해 지금은 영국 런던에 본사를 두고 34개국 67개 지사를 거느린 아이유노의 창업자 이현무 대표를 서울 압구정동의 안다즈 호텔에서 만나 그의 피, 땀, 눈물에 대해 들어 봤다. 가족과 함께 싱가포르에 머물며 영국, 미국, 싱가포르를 오가면서 일하는 이 대표는 최근 사업 점검 차 국내에 잠깐 들어왔다가 바로 출국했다.
-사명이 바뀌었다.
“원래 아이유노미디어그룹이었는데 올해 초 세계 2위 영상 현지화 업체 미국의 SDI를 인수하면서 아이유노SDI 미디어그룹으로 바꿨다.”
-아이유노를 어떤 회사로 정의하나.
“콘텐츠 연결 회사다. 영상 콘텐츠를 국경과 언어의 장벽을 넘어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해준다. 세계적인 OTT 업체들이 전세계 서비스를 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 자막과 더빙이니 서비스의 시작과 끝을 제공하는 셈이다.”
-시장 점유율과 매출액이 얼마인가.
“전세계 자막과 더빙 시장 규모가 2조~3조원 정도다. 여기서 우리가 세계 시장의 15%를 차지해 압도적 1위다. 미국과 일본 유럽은 더빙을 선호하고 아시아는 자막 위주 시장이다. 유럽이 전세계 영상 현지화 시장의 60,70%를 차지한다.”
“매출은 지난해 4,000억 원이었고 올해 4,600억 원을 예상한다. 2위인 유럽업체 매출이 1,000억 원이어서 격차가 크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최근 1,800억 원을 투자해 화제였다.
“2018년 한국의 소프트뱅크벤처스에서 240억 원 투자를 시작으로 지난 4월 손 회장의 비전펀드에서 1억6,000만 달러(1,800억 원)를 투자했다. 그때 손 회장에게 화상회의로 직접 브리핑을 했다.”
-손 회장은 무엇을 주문했나.
“AI를 강화하라고 했다. 손 회장이 처음 사업하면서 만든 것이 번역기였다. 그래서 손 회장은 언어 현지화 사업을 잘 알았고 우리 회사에 관심이 많았다.”
-그럼 주주 구성이 어떻게 되나.
“나와 스웨덴 사모펀드, 비전펀드가 3대 주주다. 아시아 유럽 미국의 벤처펀드가 골고루 섞여있다. 그만큼 경영에 대한 견제장치가 잘 돼 있다. 나를 지지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이 같이 모여서 협의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면 과정이 어렵더라도 잘못 결정할 수 있는 확률을 줄일 수 있다.”
-자막과 더빙 작업은 어떤 과정을 거치나.
“전세계 지사에 근무하는 2,500명의 직원이 성우와 번역가 등 프리랜서 2만명을 관리한다. 자막 작업은 한 편당 평균 1주일 걸리는데, OTT 업체에서 긴급을 요청하면 2시간 안에도 끝난다. 긴급 작업시 6개팀이 붙어서 10분 단위로 쪼개 자막 번역을 한다. 목소리 연기가 필요한 더빙은 한 편당 통상 8주 걸린다.”
-자막과 더빙 작업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보안이다. 시청자들보다 먼저 영상을 보기 때문에 보안이 아주 중요하다. 어떤 성우들이 어떤 작품에 참여하는지, 무슨 자막 작업 중인지 작업 내용의 외부 공개를 절대 금지한다. 모든 더빙 녹음 스튜디오는 철저한 보안 감사를 받는다. 출입자들의 휴대폰 보관소가 따로 있는지, 누가 출입제한 대상인지 등을 확인해 스튜디오 보안 등급을 따로 결정한다.”
-연간 몇 편을 작업하나.
“연 60만 편의 영상을 작업한다. 따라서 이 영상들을 관리하는 전사적자원관리프로그램(ERP)을 따로 개발해 운영한다. 이를 위해 150명의 개발인력을 따로 두고 있다. 그런 점에서 IT업체다.”
-세계 1위의 경쟁력을 꼽는다면.
“전세계에서 우리만한 규모를 갖춘 곳이 없다. 우리는 전세계 대부분의 언어를 처리한다. 2위업체만 해도 유럽, 중동 지역 언어만 다룬다. 그렇다 보니 전세계 OTT업체들이 우리에게 의지해 연말까지 더빙을 위한 녹음 스튜디오 예약이 꽉 찼다. 덕분에 함께 일하는 성우와 번역가들도 좋은 대우를 받는다. 동반 성장하는 셈이다.”
-더빙과 자막 작업에 특이한 IT기술을 적용하나.
“전세계 수십 개 언어로 번역하다 보면 빠지는 부분이 있다. 이를 자체 개발한 소프트웨어가 수십 개 언어의 자막을 비교한 뒤 빠진 부분을 자동으로 찾아낸다. 아이유노와 SDI가 이 소프트웨어를 각각 따로 개발해 썼는데, 내년 중반을 목표로 ‘싱글 프로덕션 시스템’(SPS)이라는 통합 소프트웨어를 개발 중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이후 성우들이 녹음실에 모여서 녹음하는 것이 힘들어 원격 녹음 솔루션도 개발했다. 전세계 주요 도시에 원격 녹음 솔루션이 적용된 하이브리드 허브 시설을 만들고 있다. 1인 노래방처럼 성우가 들어가서 자신의 분량을 녹음하고 갈 수 있는 시설이다.”
-인공지능(AI)도 사용하나.
“구글도 따라오지 못하는 회화 자동번역 AI 시스템을 사용 중이다. 구글 출신이 대표로 있는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 XL8에서 AI 엔진을 개발했다. 문어체 자동번역은 구글이 잘하지만 회화 자동번역은 구글보다 우리가 뛰어나다. 비결은 연간 수십 만 편 영상의 녹음과 자막 작업을 진행하며 쌓인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다. 영상 대사는 모두 구어체, 즉 생활언어다. 전세계 언어로 된 이런 데이터를 모으기 힘들다.”
-AI 번역이 사람을 대체할만 한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AI 번역 후 반드시 사람이 다시 검수한다. 영상에서 자막 번역은 시청률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칠 정도로 중요하다. 아직까지 AI는 사람을 대체하지 못한다. AI로 자막 번역하던 업체들이 있었는데 모두 망했다.”
-AI의 회화 번역이 뛰어나다면 다른 사업을 해볼 수도 있겠다.
“우리의 미래 전략이 여기에 연결된다. 라이브 콘텐츠 등 인터넷에서 일어나는 각종 행사에 이용할 수 있는 AI 동시 통역 소프트웨어를 생각 중이다. 코로나19 이후 비대면 행사가 늘고 있어 성공 가능성이 높다.”
-구상 중인 또 다른 미래 사업이 있다면.
“AI를 이용한 가상 목소리 사업도 검토 중이다. 녹음을 많이 해서 방대한 음성 샘플링을 갖고 있다. 이를 이용해 가상 목소리를 만들 수 있다. 요즘 국내 연예기획사들이 사이버 가수를 만들고 싶어한다. 여기에 가상 목소리를 넣을 수 있다. 실제로 여러 기업들과 의논을 하고 있다. 내년쯤 사업화 할 수 있을 것이다.”
-직접 영화나 드라마를 만들 생각은 없나.
“콘텐츠 제작은 예술 감각이 필요하다. 난 콘텐츠 제작을 후방에서 지원하는 게 맞다. 직접 제작은 관심 없다. 콘텐츠를 만들면 지금 수 많은 고객사들과 부딪친다.”
-2019년 유럽 BTI, 올해 초 미국 SDI를 인수해 사실상 전세계 시장을 평정했다. 추가 인수 합병(M&A) 계획이 있나.
“M&A는 계속 추진한다. 지금도 몇몇 기업을 보고 있다. 우리가 직접 진출하지 않은 중동 아프리카 중남미에 강점을 가진 기업들과 M&A를 논의 중이다.”
-상장 계획은.
“2년 후 미국 나스닥 상장을 목표로 준비 중이다. 그동안 재무 건전성을 꾸준히 유지할 계획이다. 다행히 영업이익률이 20%에 이른다.”
-원래 꿈이 미 항공우주국(NASA) 연구원이었나.
“어려서부터 물리와 수학을 좋아했다. 연세대 토목공학과에 진학한 뒤에도 구조물 설계와 관련된 구조역학 과목을 가장 좋아했다. 데이터를 이용해 효율적인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방대한 데이터를 다루는 나사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싶었다.”
-그런데 엉뚱하게 사업을 했다.
“미국 유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로 DVD 타이틀에 들어가는 자막 번역을 하다가 동료 3명과 2002년 영세한 번역 회사 아이유노를 만들었다. 회사 이름은 같이 창업한 동료 3명의 이름을 땄다. 그렇게 시작한 사업이 여기까지 왔다. 성공할 수 있다면 사업이 훨씬 더 재미있다. 후회는 없다.”
-사업 경험이 없어 힘들지 않았나.
“사업을 하면서 돈 잃는 방법 99가지를 알게 됐다. 그만큼 많이 힘들었다. 결정적으로 두 번의 위기를 겪었다.”
-어떤 위기였나.
“첫 번째 위기는 사업이 잘 돼 직원이 30명까지 커졌는데 같이 창업한 동료가 대부분의 직원들을 데리고 나갔다. 당시 나는 골방에서 자동 번역 소프트웨어를 혼자 개발하고 있었는데 동료들이 이를 철 없는 짓으로 생각했다. 내 입장에서 배신을 당한 것이지만, 내가 그들에게 미래에 대한 확신을 주지 못한 것이다. 내 곁에는 직원 1명만 남았다. 결국 매출이 0원이 됐다. 그래서 DVD 타이틀 번역에서 손을 떼고 방송 번역으로 넘어갔다.”
-두 번째 위기는 무엇인가.
“국내 모 방송사와 자막 번역 독점 계약을 하고 별 일을 다 겪었다. 거래처인 방송사 사람들이 마신 술값을 대신 계산하라는 연락도 많이 받았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일을 겪었다. 해당 방송사 임원이 장모상을 당했는데 깜빡 잊고 빈소에 가지 않았다가 거래가 끊겼다. 심지어 밑에 직원들까지 흔들어 대서 모두 나갔다. 그때 많이 울었다. 이런 일들을 겪고 싱가포르로 가게 됐다.”
-싱가포르로 간 것은 도피였나.
“맞다. 진출이 아니라 도피다. 당시 빚이 10억 원이어서 파산 신청을 고민했다. 신용 불량자로 몰릴 지경이었다. 유일하게 남은 거래처가 디스커버리아시아라는 케이블 방송이었다. 그래서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고 이들의 아시아 사무실이 있는 싱가포르로 건너갔다. 마침 다국적 영상업체의 70%가 싱가포르에 아시아 헤드쿼터를 두고 있다. 덕분에 소니픽처스 등 다른 영상업체들과 연결되며 사업을 키울 수 있었다.”
-앞으로의 꿈은.
“100년 이상 가는 미디어 기업을 만들고 싶다. 나는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사업을 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항상 손해 보는 투자를 했다. 협상을 할 때 내가 조금 더 잃는다고 생각하면 쉽게 답이 나왔다. 힘들게 싸워 조금 얻는 것보다 기꺼이 져 주는 게 낫다. 나중에 보면 결과적으로 이기게 된다. 그래서 나는 티끌 모아 티끌이라는 말을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