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부인 김건희씨를 비방한 서울 종로구 중고서점 벽화를 둘러싼 소동은 서점 측이 논란이 된 문구를 자진 삭제하는 걸로 일단락됐지만 여진은 상당하다. 여성계는 벽화가 도심 한복판에 버젓이 내걸리고 정치적 논란거리가 된 배경엔 우리 사회의 낮은 여성 인권 의식이 있다고 지적한다. 남성 정치인의 배우자를 정치 공세 표적으로 삼는 구태가 야권 대선주자 가족인 김씨에게 재연되고 있다는 성토도 나온다.
30일 한국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A 중고서점은 이날 오전 외벽에 설치된 벽화 중 논란이 된 문구들을 흰색 페인트로 지웠다. '쥴리의 남자들' '2000 아무개 의사, 2005 조 회장, 2006 아무개 평검사, 2006 양 검사, 2007 BM 대표, 2008 김 아나운서, 2009 윤서방 검사' '쥴리의 꿈! 영부인의 꿈!'이다. 이들 문구는 김건희씨가 서울 강남 유흥주점에서 '쥴리'라는 예명으로 일했다는 미확인 의혹을 바탕으로 한다. 김씨와 윤 전 총장은 앞서 이런 의혹을 강력히 부인했다.
벽화를 주문해 설치한 A 서점 대표 여모씨는 전날 "정치적 의도나 배후가 전혀 없는 풍자일 뿐"이라는 입장을 밝혔지만 비난은 거셌다. 정치권에선 야권은 물론이고 더불어민주당 소속 김상희 국회부의장까지 "시중에 떠도는 내용을 공개 장소에 게시해 일방적으로 특정인을 조롱하고 논란의 대상이 되게 했다"며 유감을 표명했다.
여성단체들도 앞다퉈 비판 입장을 냈다.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소속 60개 단체는 이날 성명을 내고 "여성에 대한 심각한 모독"이라며 "비열한 방법으로 여성을 괴롭히는 일을 중단하라"고 성토했다. 한국여성변호사회는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넘은 개인의 인격권에 대한 공격이자 침해"라고 지적했다.
여성학자들은 이번 논란이 일파만파로 번진 동력은 한국 사회에 만연한 성차별적 사고라고 지적했다. 윤김지영 창원대 교수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은 성적으로 문란해선 안 되고 흠결이 있다면 비난받아 마땅한 대상"이라며 "이런 낡은 관점이 여전히 통용되는 건 한국의 낮은 여성 인권 수준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권수현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대표는 "영부인은 조신한 여성에게 걸맞은 자리라는 고정관념이 있기 때문에 김씨에 대한 소문이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라고 짚었다.
전문가들은 윤 전 총장에 대한 정치적 공격 수단으로 김씨가 동원된 점을 주목했다. 권김현영 여성주의 활동가는 "(쥴리 논란은) 윤 전 총장을 공격하기 위해 아내 김씨의 '과거'를 도구적으로 이용한 것에 불과하다"며 "결과적으로 '윤 전 총장이 김씨를 유흥업소에서 만났다'는 연상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라고 비판했다.
권 대표는 2017년 표창원 당시 민주당 의원의 배우자가 성적 모욕을 당한 사건을 상기시켰다. 그해 표 의원이 국회에서 주최한 전시회에 박근혜 전 대통령을 나체로 묘사한 그림이 걸리자, 이에 반발한 이들이 표 의원 부인의 얼굴을 합성한 나체 사진을 현수막에 인쇄해 국회 인근에 내건 사건이다. 권 대표는 "(우리 사회는) 여성을 남성 정치인을 끌어내리기 위한 소재 이상으로 보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질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