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낡은 세상 타파하는 ‘혁명’의 도구가 되다

입력
2021.07.30 04:30
21면
식민지 조선의 혁명가들이 읽은 책
강성호 '혁명을 꿈꾼 독서가들'

비좁은 방,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이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책을 읽고 있다. 독서라는 지극히 평화적인 행위를 이처럼 숨어 해야 했던 비밀은 그들의 손에 들린 책에 있다. 모서리가 닳고 해진 ‘공산당 선언’. 이들은 바로 일제강점기 내내 식민지 조선을 뒤흔든 ‘비밀독서회’였다. 함께 책을 읽으며 식민지 교육 정책에 저항했던 비밀독서회는 나아가 동맹 휴학과 정치적 결사로 이어졌다.

독서는 근대 혁명 사상의 형성과 전파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 식민지 조선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독서’는 낡고 모순된 세상을 타파하는 ‘혁명’의 도구였다. 강성호의 ‘혁명을 꿈꾼 독서가들’은 책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열망하고 행동한 식민지 시기 '독서가'들의 독서 목록을 재료 삼은 책이다. 이를 통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고, 나아가 조선의 운명까지 뒤흔든 ‘혁명적 독서’의 위대함을 살핀다.

‘임꺽정’을 구상하는 데 영감을 준 쿠프린을 비롯해, 홍명희는 투르게네프,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등의 러시아 문학에 탐독했다. 신채호는 고토쿠 슈스이의 ‘장광설’이나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책을 통해 아나키즘에 공명하기 시작했다. 김구는 사형 선고를 받고 갇힌 인천 감옥소에서 자신의 인생을 뒤바꾼 ‘태서신사’를 읽게 된다.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 책을 읽고 김구는 탈옥 후 16년간 교육운동에 헌신하게 된다.

독서 목록만큼이나 흥미로운 건 독서 방식이다. 홍명희가 ‘완독’(끝까지 모두 읽는 방식)과 ‘남독’(아무 책이나 닥치는 대로 마구 읽는 방식)을 추구했다면 신채호는 한 번에 열 줄을 읽는다는 ‘일목십행(一目十行)’, 즉 ‘속독’을 즐겼다. 헤이그 특사 중 한 명이었던 이상설은 과학책 애독자이자 수학 교사로서 '필사'를 통해 책에 담긴 서양 과학 지식을 습득했다. 비밀독서회의 저력은 함께 모여 책을 읽는 ‘회독’에서 나왔다. 홀로 책을 읽는 묵독과 달리 구술문화에 바탕을 둔 회독은 토론을 통해 일제의 식민 지배에 ‘질문’을 던지는 매우 정치적인 독서법이었다.

책의 세 장 중 한 장을 오롯이 당시 여성 독서가들에 할애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남성 독서가들은) 자신의 독서 이력을 기록으로 남기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반면 “식민지 조선 여성들은 남성 지식인이 ‘허용’한 범위 내에서 기록을 남길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남은 자료가 부족했음을 상기하면 더욱이 그렇다.

일본의 신여성 잡지 ‘세이토’는 김일엽이 ‘신여자’라는 최초의 여성 잡지를 펴내는 데 역할을 했고, 나혜석은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 톨스토이의 ‘부활’ 등을 통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여성상을 접했다. 승마를 즐겼던 정칠성은 잔 다르크를 다룬 ‘애국부인전’과 뮬란의 원작인 ‘정목란전’ 등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박원희는 앨런 케이의 ‘어린이의 세기’를 읽고 출산을 앞둔 여성 노동자들을 위한 복지제도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저자는 빈약한 자료를 그러모아 나혜석과 김일엽, 정칠성과 박원희, 최영숙 등 근대 여성 독서가들이 어떤 책을 읽고 식민지 가부장제에 반기를 들 결심을 했는지 짐작해보게 한다.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개인적 말로는, 당시 혁명가들이 대개 그렇듯 불행했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거나,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거나, 여성에게는 기회를 내주지 않았던 공고한 가부장제 속에 쓸쓸히 세상을 떠난다. 그러나 한 권의 위대한 책이 시대와 국경을 넘어 영원히 살아남듯, 혁명을 꿈꾼 독서가들의 분투 역시 훗날 새 세상을 재촉한 마중물이 되었음을 후손인 우리는 안다.

한소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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