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메달보다 값진 은메달(혹은 동메달)’이란 표현은 틀린 거라고 배웠다. 아무리 은메달이나 동메달이 값져도, 금메달만큼 값질 순 없단 이유에서다. 쓰고 싶다면 ‘금메달만큼 값진 은메달(혹은 동메달)’로 쓰는 게 그나마 옳다고. 지금까지도 전국단위, 혹은 국제 대회 기사를 쓸 때 항상 조심하는 표현이다.
꼭 기사 쓸 때 아니더라도 ‘금메달보다 값진’이란 표현을 안 써 왔는데, 2020 도쿄올림픽 현장에선 자주 쓰게 된다. 개막 7일차를 맞은 이곳에서 어떤 보석과도 견줄 수 없을 정도로 빛나는 순간들을 목격하면서다. 반성도 한다. 꼭 ‘금메달보다 값진’ 대상이 다른 메달(혹은 결과)일 필요는 없었기에.
27일 태권도장 취재를 마치고 돌아온 숙소에서 펜과 수첩을 꺼냈다. 대회 초반 한국 대표팀의 ‘메달 기대종목’ 위주로 쫓아다니며 사진도 찍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런저런 감흥도 남겨놨지만 이날은 몇 가지 단어들을 새기고 싶었다. 최선, 승복, 인간승리, 공감, 그리고 도전. 조언은 쉽고 실천은 잘 안 되던 단어들이다.
태권도 종주국 한국의 올림픽 사상 첫 ‘노골드’가 확정된 날이지만, 금메달리스트를 못 본 아쉬움보다 절망을 딛고 후회 없는 결과를 낸 선수들이 준 울림이 컸다. 태권도 최종일인 이날 나선 선수들은 대표팀 내 주력선수는 아니었음에도 ‘종주국의 품격’을 충분히 보여줬다. 남자 80㎏ 초과급 동메달 결정전에서 승리한 인교돈(29)은 2014년 혈액암 일종인 림프종 2기 판정을 받고도 운동을 포기 하지 않았고, 결국 도쿄올림픽에 나서 값진 동메달을 땄다.
사람 욕심이란 게 끝이 없는데, 그는 처음 경험한 이번 대회를 끝으로 올림픽에 나서지 않겠다고 했다. 자신의 몸 상태를 냉철히 들여다봤단다. 이날 자신이 패한 준결승 결과를 두고도 “준비한 걸 다 쏟아내고 져서 후회나 아쉬움은 없다”고 했다. “다시 운동을 시작하면서 올림픽이란 단어는 생각도 못했다”고 말한 그는 “투병중인 분들이 저란 선수로 인해 힘을 내서 잘 이겨내 주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후 결승전을 치른 이다빈(25)은 패배 직후 승자인 세르비아의 밀리차 만디치(30)에 엄지를 치켜세웠다. 선수와 취재진의 거리가 있어 표정을 보진 못했는데, 사진을 찾아보니 세상 밝은 미소로 승자를 존중하는 모습이 놀라웠다. 엄지를 치켜세운 이유를 물었더니 “다시 하면 이길 수도 있을 것 같다”면서도, 담담하게 자신의 생각을 털어놨다. “올림픽이란 무대가 모두 힘들게 고생했고, 노력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승리를 축하해주는 게 맞다. 그래서 웃으며 축하해줬다.”
양궁장에선 자신과 무려 23세 차이 김제덕, 11세 차이 김우진과 호흡해 금메달을 합작한 오진혁(40)이 중년들을 향해 한마디 던졌다. 고질적인 어깨 통증을 안고 있던 그는 “(도전을) 안 해서 못 하는 거다, 하면 다 할 수 있다. 일단 해보자”고 말하면서 “젊게 마음 먹으면 몸도 젊어진다”고 했다. 한국 럭비 역사상 최초로 올림픽 무대에 선 남자 럭비대표팀도 1승이 쉽지 않단 걸 알면서도, 의미 있는 한 점 한 점을 위해 부딪히고 깨졌다.
남자 자유형 200m 금메달을 눈앞에서 놓치고도 “오버페이스”를 인정했던 황선우의 유쾌한 반란, 재일교포 명예를 걸고 일본 유도 심장 ‘무도관’에 기어코 태극기를 건 안창림(28)과 결승전 패배 후 일본 선수의 손을 들어 준 조구함(29)까지. 몸은 고돼도 금메달보다 빛나는 가치를 일깨운 이들 얘기를 전하는 보람과 기쁨이 큰 시간이다.
23일 개막한 도쿄올림픽이 어느덧 반환점을 앞뒀다. 한국의 메달 기대 종목 일정도 7월이면 거의 끝나지만, 아직 많은 이야기를 품은 의미 있는 도전들이 꽤 남아있다. 학폭 논란으로 태극마크를 반납한 이재영-이다영(25) 없이 올림픽 무대를 힘겹게 치러가는 여자배구의 여정과 김연경(33)의 마지막 올림픽 도전, 그리고 신설 종목 스포츠클라이밍 대표로 대회에 나서는 서채현(18) 천종원(25) 등 도전 자체만으로도 빛나는 시간이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