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120시간 노동과 여성인력의 퇴출

입력
2021.07.26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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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참 성실한 여성 후배가 술자리 적응력도 업무 능력으로 보는 남성 팀장 때문에 거의 매일 술을 마시며 힘들어 몰래 울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조언한 적이 있다. “취재원과 저녁 약속 있다고 거짓말하고 집에 들어가. 나도 그랬었어. 잘못하는 게 아니야. 그래야 니 방식으로 일을 잘할 수 있다.” 진심이었다.

한번은 정보기술(IT) 대기업에서 일하는 남성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 “일이 몰릴 때는 퇴근 안 하고 며칠 밤을 새우면서 일합니다. 남자들은 그럴 때 자기 것 끝내면 남의 일 돕기도 하는데 여자들을 보면 이기적이어서 자기 것만 하고 돕질 않아요.” 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비아냥거릴 때, 난 며칠 밤을 새워서 도저히 남의 일을 도울 여력이 없는, 퀭한 정신의 그 여성 노동자의 얼굴을 보는 듯했다.

‘장시간 노동’은 노동자의 과로를 부르고, 수시로 목숨을 앗아가는 데만 그치지 않는다. 여성, 장애인, 그리고 남성 중 체력이 강하지 않은 이까지 직업 세계에서 아예 퇴출시키는 역할을 해왔다. 육아 책임까지 전가받은 여성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악명 높은 밤샘 근무가 관행이었던 방송계에선 입사 후 몇 년이 지나면 여성 PD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내 기자 생활 초기에는 주 6일제였는데, 유일한 휴일이었던 토요일에 당직이 걸리면 13일 연속 일했다. 그런 시절이 지속됐다면, 지금까지 기자 일을 하지는 못했을 것 같다.

장시간 근무 시대는 전반적으로 직장문화의 비효율을 높여 놓았다. 일을 다 마치고도 상사 눈치를 보면서 퇴근을 못하는 한국 직장인의 풍경은 ‘일에 미친 나라’인데도 노동생산성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에 크게 못 미치는 이유와 무관치 않다. 많이 개선되긴 했지만, 회식과 폭음 문화는 부록이다. 이런 문화 속에서 패배감을 안고 떠나는 여성 노동자에게 나오는 반응은 반성이 아니라, “여자들 뽑아봐야”라는 뒷담화이다.

유력 대선주자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일주일에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하고, 이후에 마음껏 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름이 끼쳤다. 논란이 되자 “노사 간 합의하에”, 즉 ‘근로자가 원할 경우’라는 단서를 달았다. 우스운 대목이다. 주 52시간 근무를 적극 지지하는 나도, 때론 휴일을 온통 기사 구상에 쏟거나 카페에 가서 업무처리를 하며 보내기도 한다. 업무 스트레스와 별도로, 일을 잘 해내고 싶어서다. 많은 노동자들이 그렇다. 이를 “휴일에도 자발적으로 일하는 사람이 있으니 휴일을 법정 근무일로 만들어 출근하게 하자”로 받아들인다면, 대체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또 초과근무가 노사 합의라고 해도 ‘을’의 입장인 노동자의 동의가 과연 진정한 동의겠는가. 일부 임금을 더 받기 위해 장시간 근로를 선호하는 사람이 있어도, 그건 열악한 임금조건과 노동환경에서 기인한 것이지 자발적인 선택일 수 없다.

여성 노동자에 대해 썼지만, 남녀의 이해가 다르지 않다. 상대적 약자에 기준이 맞춰질 때, 제도의 혜택은 모두에게 돌아간다. 무엇보다 일부 남성 인력이 장시간 노동을 견딜 수 있다고 해서, 그래도 된다는 건 아니다. 퇴출해야 할 것은 그렇게 만든 상품, 그런 생각을 하는 경영자와 정치인이 아니겠나.

이진희 어젠다기획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