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파리올림픽 때 현지 공영방송사 프랑스 텔레비지옹이 한국 선수단을 소개하는 화면에 2014년 세월호 사고 이미지를 띄우면 우리 시청자들은 어떤 기분일까.
어처구니없는 방송사고가 2020 도쿄올림픽 개회식 중계에서 벌어졌다. 준 공영방송인 MBC가 '대형사고'를 냈다. 우크라이나 선수단이 화면에 나올 때 1986년 구 소련 체재에서 벌어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로 무너진 건물 사진을 내보내 안팎으로 논란이 커지고 있다. 다른 나라를 소개하는 자료 화면에 부적절한 사진과 자막을 이용해 외교적 결례를 범했다는 지적이 쏟아지고 있다. MBC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 중계방송에서도 비슷한 방송 사고로 방심위의 징계를 받은 적 있어 내부 시스템 개선이 시급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MBC는 내부 제작 시스템 조사에 착수했다.
MBC는 23일 생중계에서 우크라이나 선수단이 입장할 때 화면 왼쪽 상단에 체르노빌 원전 폭발 현장 사진을 썼다. 많은 인명 피해를 냈던 최악의 방사선 누출 사고를 소환한 건 적절치 못했다는 지적이다.
MBC는 아이티 선수들이 입장할 때는 시위대 위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사진을 띄운 뒤 '대통령 암살로 정국은 안갯속'이란 자막을, 마셜제도 입장 때는 '한때 미국의 핵실험장'이란 자막을 내보냈다. MBC의 '무례한' 자료화면은 곳곳에서 속출했다. 시리아를 '10년째 진행 중인 내전'이라 상황을 소개하는가 하면, 팔레스타인 선수 입장 때는 이스라엘의 분리장벽을 내보냈다. 탈정치를 추구하는 올림픽과 배치되는 해당 국가의 정치적 갈등을 되레 부각했다. 엘살바도르 선수단 입장 때는 비트코인 사진을 썼다. 엘살바도르가 비트코인을 법정 화폐로 채택하긴 했지만, 현지에서 반대 시위가 거세고 그 배경엔 경제난이 깔려 있어 조롱으로 비칠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평등과 평화를 최고 가치로 두는 올림픽 정신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자료화면도 잇따랐다. 중계 화면엔 1인당 GDP(국민총생산)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접종률 등이 표기됐다. 올림픽과는 상관없는 정보로 국가를 비교하고 격차 조명에 집중했다는 비판이 나온 배경이다.
'선'을 넘은 중계방송은 결국 공분을 샀다.
MBC 중계 화면 이미지는 순식간에 온라인으로 퍼졌고, 이를 본 해외 네티즌들은 '우크라이나와 체르노빌을 연관시키는 게 온라인 사과로 해결될 일인가' 'GDP와 스포츠가 무슨 상관이냐. MBC의 의도가 무엇인지 모르겠고, 굉장히 무례하다' 등의 글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렸다. 뉴질랜드 일간 뉴질랜드헤럴드는 '방송사의 부적절한 국가 소개의 역겨움'이란 제목으로 MBC의 개막식 중계를 꼬집었다. 트위터에선 '#나라 망신'이란 해시태그가 24일 실시간 트렌드에 올랐다. MBC가 부적절한 개회식 중계로 국격을 떨어트렸다는 네티즌의 집단 항의가 모인 데 따른 것이다. 23~24일 이틀에 걸쳐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엔 MBC 방송 사고에 대한 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청원이 잇따라 제기됐다.
정치권도 MBC에 대한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의 중징계를 요구하며 비판에 가세했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25일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당 미디어국 명의로 26일 방심위에 MBC 심의를 신청할 것"이라고 말했다. 심의신청 명목은 방송심의규정 제7조 제6항 '방송의 공적책임' 위반이다.
MBC는 24일 낸 사과문에서 "문제의 영상과 자막은 개회식에 국가별로 입장하는 선수단을 짧은 시간에 쉽게 소개하려는 의도로 준비했지만 당사국에 대한 배려와 고민이 크게 부족했고, 검수 과정도 부실했다"며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잘못"이라고 밝혔다. MBC는 지난 2월 조직개편에서 22명 규모였던 MBC 스포츠국 인력을 12명으로 줄이고, 중계 등 일부 프로그램 제작 업무를 MBC플러스로 이관했다. 이 과정에서 조직 내 잡음이 불거졌고, 이런 조직적 문제가 중계 사고의 빌미가 된 게 아니냐는 목소리도 방송가에서 나온다. 도쿄올림픽 개막식 중계 자료화면은 외주가 아닌 사내 인력이 제작한 것으로 확인됐다. MBC는 "올림픽 중계에서 발생한 이번 사안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영상 자료 선별과 자막 정리 및 검수 과정 전반에 대해 철저히 조사한 뒤 그 결과에 따라 엄정한 후속 조치를 취하겠다"고 했다.
MBC의 사과에도 공분은 쉬 사그라지지 않는 분위기다. MBC가 13년 전 베이징올림픽에서 국가 비하 자막 등을 이유로 방심위에서 '주의' 조치를 받았는데, 표현의 무례함이 오히려 강도가 더 세진 것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당시 MBC는 케이맨제도를 '역외펀드를 설립하는 조세 회피지로 유명'으로, 차드에 대해선 '아프리카의 죽은 심장'이라고 표현해 물의를 빚었다. 영국령 버진 제도에 대해선 '구글 창업자 결혼식 장소'라며 희화화했다.
김헌식 동아방송대 교수는 "선진국이 된 우리의 우월의식이 무의식적으로 이번 사고에 작용하지 않았나 되돌아봐야 할 때"라며 "약소국을 향한 우월의식이 이런 식으로 작동하면 외교적 결례뿐 아니라 폭력으로 비쳐 국제사회에 고립될 수 있기 때문에 우려스럽다"고 진단했다. 성상민 대중문화평론가는 "베이징올림픽 때 문제적 표현으로 징계까지 받았는데 같은 문제가 반복되고 어떤 면에서 그 수위가 더 세졌다는 건 결국 내부에서 전혀 문제 개선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라며 "제작 시스템을 점검할 필요가 있는데, 쉽게 바뀔지는 의문"이라며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