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바이올리니스트의 뇌종양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친 신경외과 의사 채송화. 독일 방송사의 수술 관련 인터뷰 요청을 거절한 이유에 대해 설명하며 한 말이다. "왜 인터뷰를 안 한다고 했느냐"며 채근하던 후배 허선빈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자신을 낮춰 후배들을 챙기는 따뜻한 배려심은 채송화의 성품. 불행히도 현실에서는 도저히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아니 존재하지 않는 환상 속 인물이다.
특히 직장 생활에선 더욱 그렇다. 후배가 올린 성과를 가로채 본인이 한 것처럼 보고하는 선배, 하기 싫은 일은 모조리 후배에게 미루는 선배, 눈에 보이는 폼 나는 일만 하려는 선배, 일방적 지시로 후배들의 괴로움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는 선배 등등. 현실 속 선배들은 하나같이 정상적인 이들이 없다.
그래서 tvN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분명 의학 드라마지만, 직장인들 사이에선 일찌감치 '직장 판타지물'로 불린 이유다. 왜 우리 주변엔 채송화 같은 따뜻한 선배가 없는 것일까. 그리고 과연 우리는 채송화 같은 좋은 선배가 될 수 있을까.
사실 '채송화식' 멘토링 기술은 그리 특별하지 않다. 온갖 미사 여구로 치장된 칭찬 퍼레이드는 물론이고, 무엇보다 '라떼는 말이야~'라는 전제가 없다. 그저 소박하고 진솔하며 담백할 뿐이다.
그러나 메시지는 강하다. 시즌 1에서는 질문을 활용해, 시즌 2에선 공감의 정서를 불어넣어 명확한 조언을 건넸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어느덧 성장한 후배들의 눈높이에 맞는 '맞춤형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 가히 '신들린' 리더십이다.
시즌 1을 보자. 채송화는 신경외과 후배인 허선빈, 용석민, 안치홍에게 질문을 쏟아냈다. 그는 수술실에서 불쑥 "수술할 때 세척 잘하는 게 중요한 거 알지?"라고 묻고는 "왜 중요해?" 하며 후배의 지식을 끄집어낸다. 후배의 브리핑이 끝나자마자 그는 가차 없이 또 묻는다. "진짜 그게 맞아?"라고.
채송화의 질문 세례는 멈출 줄 모른다. 함께 회진하며 후배가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환자 증상을 설명하자, "그 증상이 확실해? 틀렸어? 난 맞는 것 같은데... 다음 회진 때까지 유사 논문과 수술 사례 정리해서 와"라고 한다.
업무에 대한 긴장감과 책임감을 동시에 주입시킨다. 그러면서 자신이 왜 '질문형 선배'인지 후배에게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다. 말투와 표정에는 진심이 담겼다.
"수술을 하거나 환자를 대할 때 항상 긴장하라고 그러는 거야. 이 일이 힘은 드는데 금세 익숙해져. 내가 1년에 200번 이상 수술을 하지만, 이게 익숙해져서는 안 되는 거잖아. 그래서 그래."
시즌 2에선 업무보다는 '인생 선배'로서의 멘토링으로 업그레이드됐다. 후배들의 실력이나 재능을 인정해주며 의사로서 역할, 인간 관계 등 사회생활의 어려움을 공감하며 나눈다.
환자 수술 이후 결과를 놓고 펠로우(전임의)와 갈등을 빚은 후배에겐 "네 판단을 믿으라"고 조언한다. 10여 년 동안 쌓은 전공의로서 이력을 재확인시켜 준다.
그러면서 "네 판단이 맞다고 생각되면 밀어붙였어야지"라며 "치열하게 고민하고, 치열하게 환자 봤으면, 치열하게 싸워. 그래야 환자 살려"라고 힘을 실어준다.
심지어 방패막이도 자처한다. 전문의가 아니라는 이유로 의사로서의 자질을 의심하는 환자 보호자에게 "전공의들도 명백한 신경외과 의사고 공부 10년 가까이, 10년 넘게 한 사람들"이라고 똑 부러지게 짚어준다. 이어 "충분한 의학적 지식도 있고, 오히려 저보다 환자에 대해 더 많이 아니까 잘 알려주실 거다"라며 후배의 자존감을 살려준다.
현실의 직장인들은 채송화 같은 선배가 절실하다. 패션업계에서 일하는 직장인 문지영(가명·32)씨는 "하루에 10시간 가까이 가족보다 더 오래 붙어 있는 직장 상사가 채송화 같은 선배라면, 삶이 각박하다고만 느끼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금융업계에 종사하는 김명은(가명·29)씨도 채송화 캐릭터에 푹 빠져 있다. 김씨는 "업종 특성상 경쟁하기 바쁜 선배나 동료와의 관계 속에서 채송화 캐릭터를 통해 위로를 받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좋은 선배에 대한 열망은 우리만의 얘기는 아니다. 직장 생활을 앞둔 미국의 젊은 세대 역시 현명하고 신뢰할 수 있는 멘토를 원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Z세대(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 출생)의 사회학적 특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기관인 스프링타이드 연구소(Springtide Research Institute)는 18~25세 사이의 7,000여 명을 대상으로 '일과 삶의 균형'에 대한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이들 세대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하면서도, 일과 삶의 균형을 걱정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러나 대부분은 일과 삶에 대해 조언을 해줄 멘토가 없다고 답했다.
특히 Z세대들이 직장 생활에서 가장 중요하게 꼽는 것이 상사와의 관계였다. 이들 세대의 82%는 직장 내 멘토링을 통해 상사가 성과 목표를 설정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답했다. 또 83%의 젊은이들은 상사가 자신의 삶에 관심을 가져주기를 원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선배로부터 공과 사의 경계 없이 풍부한 경험과 지식 등을 전수받고 싶다는 얘기다. 즉 업무에 대한 지도 및 인생에 대한 조언을 들을 준비가 돼 있다는 것.
조시 패커드 스프링타이드 연구소 이사는 "Z세대에게 직장은 단순히 일을 위한 장소가 아니라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장소가 될 것"이라며 "그 속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인간적인 신뢰"라고 분석했다.
이들 Z세대가 좋은 선배를 찾아 의지하려는 건 시대적 불안감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이들은 2008년 경제 불황과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금융 위기를 겪으면서 불안이 가중됐다고 연구소는 전했다. 그로 인해 인생 경험이 풍부한 선배, 상사 등 멘토를 찾는 이유라고 짚었다.
그러나 취업하는 순간 좋은 선배에 대한 환상은 실망으로 바뀌기 마련이다. 능력 위주의 평가, '평생 직장' 개념이 사라진 잦은 이직과 퇴사, 성과주의 등이 맞물리면서 직장 내 인간 관계는 여전히 힘든 과제다.
그래서 직장인들이 퇴사하는 가장 큰 요인이 상사와의 불협화음이라는 조사 결과도 있다. 취업사이트 인크루트는 지난해 연말 직장인 665명을 대상으로 퇴직을 결심하는 사유에 대해 설문조사를 했다.
그 결과 ①상사의 잔소리(15.0%)로 인한 퇴사가 가장 많았으며 ②대인 관계 스트레스(14.3%) ③연봉(13.0%)이 그 뒤를 따랐다. 특히 신입사원의 경우 퇴사 고민 사유로 상사의 잔소리(15.3%)를 가장 많이 꼽았다.
더불어 젊은 세대 사이에서 이직률이 점점 높아지는 경향이 뚜렷해지면서 직장 내 소속감이 떨어지고 상사 및 동료와의 관계가 느슨해지는 현상도 벌어지고 있다.
기업들이 나서서 구성원들이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문화를 만들려는 움직임이 새삼 주목받고 있는 이유다. 미국 하버드경영대학원의 월간 매거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는 "소속감은 인간에게 필수적"이라며 "심리학자들은 소속되고 싶은 욕구를 사랑에 대한 욕구와 동등하게 평가한다"고 전했다.
회사에서 부장 직급인 차주영(가명·45)씨는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채송화를 보면 자기 반성을 하게 된다고 한다. '나는 과연 좋은 상사인가' '후배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나' '너무 앞만 보고 달린 건 아닌가' 같은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고.
차씨는 "부장이라는 직함으로 3년 넘게 일하면서 내가 어떤 리더인지를 곱씹게 됐다"며 "호의적인 말투 등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지닌 채송화 리더십에 생각이 많아진다"고 털어놓았다.
직장인 강하늘(가명·34)씨는 후배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선배가 되고 싶다. 강씨는 "나 역시 누군가에게 멘토로서 좋은 영향을 미치고 싶지만, 요즘엔 '꼰대'라고 할까 봐 후배들 눈치보기 바쁜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직장인 박수정(가명·40)씨도 "인생 선배로서 조언해주고 싶은 후배들이 많다"며 "그러나 접근이 조심스럽다. 회사에서 하는 형식적인 리더십 교육이 아닌 제대로 배우고 싶다"고 토로했다.
좋은 선배가 되고 싶어하는 직장 상사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방법을 몰라 주저할 수도 있다. 미국 경제매거진 포브스는 후배나 부하 직원에게 영감을 주고, 그들의 장점을 끌어내며, 장애물이 생겼을 때 기꺼이 도움을 주는 특별한 리더십이 있다고 보도했다.
포브스에 따르면 영감을 주는 리더에게는 중요한 6가지 자질이 있다. 그 능력은 채송화가 갖춘 리더십으로 ①스트레스 받는 상황에서 침착하다 ②인간적인 면을 보여준다 ③늘 경청한다 ④회복력이 있다 ⑤진실성을 보여준다 ⑥재능을 키워준다 등이다.
먼저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 영감을 주는 리더는 침착하다. 차분한 태도로 도전에 맞닥뜨려도 팀원들과 함께 해결책을 찾는다. 당황하거나 평정심을 잃거나 비난을 퍼붓는 리더와는 반대되는 덕목이다. 침착한 리더들은 팀원이 문제를 일찍 파악해 함께 해결할 수 있도록 격려한다.
인간적인 면모를 지닌 리더들은 팀원들 개개인에 관심이 높다. 이들은 진정으로 경청하고 팀에 대한 연민과 관심을 보여줄 것이다. 리더가 팀원들이 겪는 문제와 우려 사항을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중요하다. 이 때문에 좋은 리더는 팀원들에게 관심을 보이고 어려운 시기에 그들을 위해 함께 한다.
리더에게 경청하는 것은 정말로 중요하다. 영감을 주는 리더는 의미를 듣고 응답하기 전에 잠시 멈춘다. 이러한 리더는 상대방이 말하는 동안 다른 생각을 하거나 멀티태스킹에 참여하지 않는다. 대답할 때는 그 사람의 말을 실제로 들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언어를 사용할 것이다.
모든 리더는 장애물에 부딪히거나 프로젝트가 실패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훌륭한 리더는 이러한 상황에서 교훈을 얻고 역경을 이겨낸다. 팀원을 탓하지 않고 감정을 억제하고 상황에 적응하는 방법을 모색해 회복력을 보여주게 된다.
성실함을 보여주는 것도 영감을 주는 리더의 덕목이다. 이들은 약속을 지키고 신뢰할 수 있다. 이들은 가치관과 행동이 일치하며, 자신의 업무와 팀원들의 안녕과 발전에 신경을 쓴다는 특징이 있다.
후배의 재능을 키워주는 능력도 좋은 리더들의 강점이다. 이들은 인재를 개발하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를 테면 팀원들의 능력을 키워서 안전지대 밖으로 도전할 수 있도록 한다. 후배들이 더 좋은 환경, 보다 넓은 세상에 나가도록 문을 열어주는 것이다.